Mung2022. 1. 23. 15:36

생각해보니 벌써 한 30년쯤 전, 국민학교 3학년때쯤이었던것 같다.


사촌형과 함께 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커다란 박스들을 주섬주섬 푸시면서, 이것저것 선을 연결해주기 시작하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 첫 컴퓨터 이름은 현대 솔로몬 486DX 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인치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14인치쯤 되는 배불뚝이 CRT모니터가 함께 있었고.

함께 왔었는지 나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HP 500K인가 하는 잉크프린터도 함께였다.


컴퓨터를 설치할 책상도 없었던지라,

안에 모형꽃이 가득 들어있던, 내 무릎정도 되는 테이블 위에 설치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컴퓨터 가격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최고급 사양의 맥북보다도 비쌌을것이다.

내가 첫 컴퓨터를 갖게 되고도, 몇년 후에 나왔던 세종대왕이나 진돗개니 하는 컴퓨터들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으니,

내 솔로몬 486DX는 더 비쌌을것이다.

단순히 짜장면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와 비교만 해봐도, 그 당시 컴퓨터의 가격은 지금돈으로 천만원은 넘지 않았을까 싶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부모님이 왜 그렇게 거금을 들여서 컴퓨터를 사주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컴퓨터를 사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천리안이라는 통신도 연결해주셨다.

그 당시 통신이란 것은 전화선을 이용하는 것이라, 통신하는 동안에는 집전화가 계속 통화중이었다.

그래서 다른 집들은 통신을 못하게 했다던데, 우리집은 내 방에 전화선을 새로 하나 따줄만큼 적극적이셨다.

사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그렇게까지 해주셨는지 잘 모르겠다.


또래들 중 그 누구보다 빠르게 컴퓨터를 접하고, 통신을 접한 나는 컴퓨터를 좋아할수밖에 없게 됐다.

누구보다 특별하게 살고 싶었지만 노력은 하기 싫었던 나에게 있어서 컴퓨터란,

그 누구보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었다.


한때 학교에서 통신 바람이 불때, 반에서 친하지 않던 어떤 여자애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서 통신하게 해줄수 있어?

사실 통신을 하려면 천리안에 돈도 내야되고, 모뎀도 있어야되고, 뭐 이래저래 해줘야 되지만 난 그런걸 알리가 없었다.

그저 집에 있는 컴퓨터를 보니, 전화기 뒤에서 선 하나를 빼서 컴퓨터 모뎀에 꽂고, 컴퓨터에서는 천리안을 실행시키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 여자애의 집에 초대받아, 통신을 설치해주기 시작했다.

전화기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에, 그 여자애의 어머님께서 손으로 돌리는 옛날전화기를 갖다 주셨고,

전화기 뒤에 선이 한개밖에 연결이 안되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진 나는,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통신을 하게 해달라고 말한 그 여자애나, 내가 해주겠다면서 그집에 찾아간 나나, 그런 나를 믿고 지켜봐주시던 그 어머님 모두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하여튼 나는 그렇게 주변에서는 컴퓨터를 제일 잘하는 친구였다.


사실 어릴때 컴퓨터를 접한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에게 있어서도 컴퓨터란 여러가지 게임을 골라서 할수 있는 게임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를 사면, 수백개의 게임을 깔아주는게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매일 어떤 게임을 해볼까 고르면서 시간이 흘러갈 때쯤, 컴퓨터를 좀더 과학적으로 접근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갔었다.

옛날에는 교보문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컴퓨터 코너가 있었다.

그곳에는 정품게임들과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난 당연히 안사주실거라 생각하면서, 게임 하나를 집어서 사달라고 말을 꺼냈고.

놀랍게도 엄마는 아무말 없이 사주셨다. 그 당시 가격이 4만9천원쯤? 엄청나게 고가의 게임이었다.


그 당시 왜 엄마가 아무말 없이 사주셨는지 몰랐다. 당연히 안사주실거라 생각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서점에 따라와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셨던건 아닐까 싶다.


여하튼 그렇게 비싼 게임. 팔콤사에서 만든 영웅전설4 라는 게임을 들고 집에 와서 실행을 시키려는데.

게임이 실행되지 않았다.

어느덧 내 컴퓨터는 나이가 들어, 그런 최신의 게임을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웠던 것이다.

그 당시 통신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찾고, CPU가 뭔지 RAM이 뭔지 Disk가 뭔지 공부하고 가상메모리가 뭔지 왜 실행이 안되는건지 몇일동안 계속해서 찾아봤던거 같다.

그냥 게임을 못하는 것이 속상했다기보다는, 엄마가 거금을 들여 흔쾌히 사주셨는데 그게 실행이 안된다는 사실이 더 슬펐던거 같다.


그렇게 꽤 오랜시간동안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컴퓨터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가상메모리 확인하는법, 늘리는법, OS단에서 셋팅하는 법 등등 원리는 모르지만,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었고.

결국 난 영웅전설4의 첫 화면을 보게 되었다.

그 첫 화면이 떴을 때의 그 희열감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겪은 저 성공경험은, 어린 나에게 컴퓨터 말고 다른 것을 업으로 생각할수 있게끔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당연히 컴퓨터를 업으로 삼게 될 사람이었고, 그 외의 것은 거의 생각해본적이 없다.


10여년쯤 전, 인턴생활을 할때 멘토에게 했던 푸념이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IT를 업으로 택한건 억울한거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야근도 해야되고, 계속해서 신기술은 나오고 있으니 공부도 해야되고,

그렇다고 대우가 좋은것도 아닌데 왜 IT를 업으로 택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멘토분의 말도 기억이 난다.

스스로 고칠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상황 안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생각하시는게 더 생산적일것 같네요.

그렇게 한때는 이렇게 평생 살아갈수 있을까? 나에게 주5일제는 꿈같은 일인가?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개발자 몸값은 하늘을 모르고 치솟으면서, 주변에는 IT를 배워 중고신입으로 입사하고 싶다는 사람들과,

판교에 대한 환상같은 소리도 들려오고, 국비학원 6개월만 다니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다는 말 등등.

강산이 한번 바꼈을 뿐인데, IT에 대한 인식은 3D업종에서 가장 핫한 직업군이 되어버렸다.


별 생각 없이, 그냥 30년전 부모님이 사주신 486 컴퓨터 한대로 인해 컴퓨터만 해오던 나 역시도,

무슨 미래에 대한 대단한 혜안이 있고, 4차혁명을 미리 예견하고, 한가지 분야만 꾸준히 뚝심 있게 판 사나이가 되어버려,

이 상승장에 휩쓸리게 되었다.


내가 별다르게 노력을 한 것은 없다.

대단한 꿈을 품었던 적도 없고, 미래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던 적도 없다.

그저 30년전 나와 함께 영웅전설4 첫 화면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현대 솔로몬 486DX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Posted by v멍군v
Mung2021. 1. 19. 23:34

오랜만에 글 쓰려고 봤더니, 1년이 넘게 새 글을 안 썼구나...

하루하루 회사 다니는 회사원의 생활이 다 그게 그거지 라는 생각을 위안삼아 우선 다른 주제로 글을 써본다.

 

이 글은 메니에르라는 몹쓸병에 걸린 환우들을 위한 투병일지다.

뭐 이런걸 쓰나 싶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의 투병일지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받았던 바.

이 요상하고 짜증나는 병에 걸려 불안에 떨고 있을 누군가에게 돌려드리고자 한다.

 

2020.12.30 (수)

전날 늦게까지 휴대폰 보다가, 왼쪽 귀 바로 옆에 놓고 잔 휴대폰에서 폭풍같은 알람이 터져나왔다. (아마 전날 동영상 본듯)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귀가 살짝 멍멍했다.

큰 소리 들으면 귀가 멍멍해지는 게 당연하고, 샤워하고 나니 말끔히 사라짐.

기억은 안나지만 거의 99% 확률로 이날도 야식에 맥주를 먹고 잤을거임.

 

2020.12.31 (목)

내 기억력은 마리모 수준인지, 전날과 동일한 패턴으로 큰 소리에 잠을 깸.

이번에는 전날보다 좀더 귀가 멍멍했으나, 출근하고 회사에서 소음속에 있다보니 그냥저냥 괜찮았음.

새해 타종행사라는 핑계로 가마치통닭에 맥주를 먹었고.

이상하게 잠이 안와서 새벽 4시까지 놀다가 잠듦.

 

2020.01.01 (금)

아. 망했다.

일어나자마자 귀에 이상을 느꼈다. 귀에 물이 들어간것보다 좀더 과하게. 비행기를 탄것처럼 귀가 멍해졌다.

나는 다이빙을 배울때도 이퀄라이징 (귀 압력 조절하는거)을 엄청 쉽게 하는 편이었는데도, 좀처럼 귀가 편해지질 않았다.

하품을 해봐도, 코를 막고 바람을 불어봐도 왼쪽귀가 멍해졌다.

그렇다고 또 완전 안 들리는건 아니었고, 뭔가 왕왕~ 하는 듯한 백그라운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다 싶어 급하게 문 연 병원을 찾아봤으나, 공휴일에는 열어도 신정에는 대부분 문을 닫더라.

이때까지만 해도 별거 아니겠지 싶었으나, 이어진 검색결과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돌발성 난청. 이명. 메니에르병. 한지민. 난청. 달팽이관. 림프액. 고막. 어쩌고 저쩌고.

이중에서 특히 돌발성 난청에 대한 결과들이 너무 무서웠는데,

특별한 원인 없이 발병하며, 발병하고 일주일 이내 치료하지 않으면 영원히 귀가 안 들릴수도 있다는 끔찍한 결과들이었다.

그래서 돌발성 난청으로 의심되면 무조건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써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큰만큼, 반대의 생각도 컸다.

응급실? 그거 뭐 죽을만큼 아플때나 가는거 아닌가? 진짜 설마 내가 귀가 먼다고? 뭐 이런거 가지고...

단순 중이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짐. (현실도피였던듯)

 

2020.01.02 (토)

자고 일어났더니 귀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급하게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이비인후과로 갔다. (이때 평창에 머물고 있어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 원주에 있었음. 차로 한시간 거리)

하필 어린이전문 느낌의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내 고막은 순결하니까 어린이 고막이라고 생각하고 진료 받음.

중이염이 아닐까? 라는 기대와는 달리, 고막은 깨끗함.

코로나 검사도 아닌 것이, 콧속에 젓가락을 넣어서 코안도 봄.

이번에 안 사실인데 내 오른쪽 코 안쪽은 휘어져 있다더라.

아주 옛날에 식당에서 밥 먹다가, 오른쪽 코에서 미친듯한 코피를 쏟았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랬던건가...

여하튼 코도 정상이고... 청력검사를 해봤다.

건강검진 하면서 10번도 넘게 해본 청력검사여서 별 생각 없었는데, 결과지가 이제와는 달랐다.

왼쪽 귀 4K주파수 대역 난청. 엥?

내가 벨소리를 크게 들었다. 몇일 전부터 그랬다 등등의 문진 결과가 합쳐져서 나온 병명은.

급성 음향 외상.

그냥 큰 소리를 팡~ 하고 들어서 고막을 잡아당기는 근육이 놀랐나 뭐 어쨌나 해서 이럴수 있단다.

그리고 아주아주 아기자기한 스테로이드를 처방받고 끝.

 

2020.01.03 (일)

스테로이드만 먹으면 내 허벅지도 마동석씨의 팔뚝만해지고, 온몸에 힘이 넘치는줄 알았는데.

내가 먹는 스테로이드는 그게 아니라더라.

여하튼 스테로이드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전혀전혀 1도 호전되지 않음.

이때부터 뭔가 다시 불안해져서 폭풍검색 시전.

온갖 귀에 관련된 검색을 넘어서서, 의학 논문까지 읽기 시작함. 이제까지 읽은 컴퓨터과학 논문보다 더 많은 양의 의학논문을 빠르게 읽음.

어릴때 본 영화중에, 본인 아들의 불치병을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다가 신약을 개발한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때만 해도 뻥이라 생각했으나, 막상 닥쳐보니 가능할 것처럼 느껴짐.

어느새 나는 안아키까지는 아니더라도, 귀에 좋다는 음식을 달달 외우게 됨.

 

2020.01.04 (월)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지, 귀가 전혀 나아지지 않음.

다행히 재택하는 날이라 점심시간에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음.

코로나 시국에 이비인후과에 가는게 내심 쫄렸지만, 다행히 병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의느님은 나의 얘기 + 원주 병원에서 들은 얘기 + 콧속을 다시 한번 휘젓고 + 청력검사를 한 결과.

응?

이번에는 4k는 멀쩡하고, 저음역대의 난청 소견이 보였다.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왜냐면 청력검사 해보면 알겠지만, 이게 거의 동일한 간격과 패턴으로 삐삐 음이 울리기 때문에 좀 하다보면 기계적으로 버튼을 클릭하게 된다.

안 들리던 것도 이때다 싶어 집중하면 들리니 더 잘 들리기도 하고.

뭔가 나 스스로 청력검사를 망쳐버린것 같지만, 여하튼 결과는 저음역대 난청.

의느님께서는 아무래도 대학병원 가봐야 될거 같은데, 요즘 코로나 시국이라 예약이 어려우니 대학병원 예약부터 진행하자고 하셨다.

우선 또 다시 스테로이드를 처방받고 집에 와서 두려움에 휩싸인채 일을 했다.

집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대학병원 예약시스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생각외로 간편하게 되어있는 시스템에 놀랐고, 뭐 말로만 듣던 1차병원 2차병원 어쩌고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게 됐다.

그렇게 다음주 월요일에 우선 예약을 걸어놨다.

(급하게 잡느라 이비인후과 명의고 뭐고 알아볼 새도 없이, 그냥 이비인후과 전문의중에 아무나 잡음)

 

2020.01.05 (화)

이쯤되면 거의 망했다는 느낌이 온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하루종일 인터넷 검색으로 내 병이 도대체 뭔지, 왜 걸린건지, 어떻게 치료하는지 찾고 있다.

이 세상에 귀질환 환자가 이렇게나 많은줄 몰랐고, 생각 외로 '이명을 극복하는 사람들'같은 류의 네이버카페에 정보가 많았다.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뭔가 나와 비슷한 증상이 보이면.

오 맞아! 이거야! 맞네. 갑자기 안 들리고. 귀가 멍멍하고. 어지럽지는 않으니까 내 병은 '돌발성 난청'이구만. 하면서 열심히 찾아보고.

또 다시 다른 글중에 비슷한 증상이 보이면.

오. 생각해보니 나도 약간 이런 증상인데? 좀 어지러운거 같기도 하고?... 청력검사에서 저음역대가 안 좋았으니까 '급성 저주파감각신경성난청' 인가?... 하면서 좀 찾아보고.

 

2020.01.06 (수)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이건 망했다. 난 이제 앞으로 한쪽귀가 먼 반 고흐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귀가 안 들리고, 미쳐가다가 귀를 잘라버릴지도 몰라. 엉엉.

병원에 가자마자 의느님께,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의느님은 바로 언제 예약했느뇨? 라고 여쭤보셨고.

그게 뭐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 그냥 클릭 몇번하고 어쩌고 저쩌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각설하고 월요일에 예약했다 했더니.

'너무 늦어 이 친구야. 자네는 이미 장애진단을 받기 일보직전이라네!!' 라는 말과 함께,

꼭 서울대병원 아니어도 되니까, 고대병원이나 뭐 다른 대학병원을 예약하라고 하셨다.

그말 끝남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대병원에 전화했더니, 당연히 예약은 풀.

'상담원님. 미리 말씀을 못 드렸는데 사실 저 돌발성 난청 진단 받았습니다.'

라고 했더니, 기적과 같이 지금 당장. 롸잇 나우. 택시타고 병원으로 텨오세요 라는 응답을 받았다.

그 대답을 들으니 다행이다라는 생각 바로 직후에, 이게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병이길래 예약시스템을 무시하고 앞으로 땡겨서 진료해주는거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여담으로, 서울대병원에 예약취소하려고 전화 걸었더니 내 예약은 4월로 되어 있더라.

IT하면서 월급 받으니 10년이 넘었는데도 예약시스템의 달력도 제대로 못 봐서 4월로 예약해 둔거였음. 잉긱.

 

그렇게 바로 고려대병원으로 갔다.

5인 이상 집합금지 걸려서 갈곳 없는 사람들이 전부 병원에 모여있는지, 엄청나게 많은 인파 속에서 수납지옥을 끝마치고 이비인후과 병동으로 갔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다가갈수록 점점 왼쪽귀에 쿵쿵대는 소리가 커졌고.

드르르륵 드르르륵 우장창 우장창 쾅쾅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망했네. 귀 질환은 심리적인 요인과 스트레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더니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난청과 이명을 넘어서 환청의 단계에까지 도달했구나. 라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이비인후과에 도착해서 창밖을 봤더니.

이런 망할. 하필 요즘 고대병원 새로 짓는다고 뻥 안치고 이비인후과 바로옆 창문 30센치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온갖 종류의 굴삭기들이 땅을 파고 뽀시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건 진짜 좀 너무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대학병원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스펙타클한 곳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어디가 불편하시다고요?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예. 저번주 목요일쯤부터 왼쪽 귀가 멍멍하고요... 라는 내 투병일지의 장대한 인트로 부분을 시작할때쯤.

갓 대학병원 의느님께서는 뭔가 전단지 한장을 바로 주셨다.

뭐야.

'평소에 짜게 드시죠? 술 많이 드시죠? 늦게 주무시죠? 단거 많이 드시죠? 탄산 좋아하시죠? 조미료 많이 드시죠?"

"그...그건.... 그렇죠."

"그렇게 살면 걸리는 병입니다. 메니에르. 우선 청력검사 좀 하고 다시 봅시다."

뭔가 1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문진 - 진단 - 병명 이 나온 상황이라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야매스러운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청력검사 하러 밖으로 나가는데, 등 뒤에서 의느님이 물어보셨다.

"근데 어느쪽 귀가 불편하시다고요?"

뭐여. 무슨 귀인지도 모르고 뭔 병명이 바로 나오는거야. 야매다. 이것은 야매다.

 

의느님에 대한 신뢰도가 급하락한 상태에서, 굴착기 소음 속에서 진행된 청력검사가 정상일리가 없다.

이게 지금 청력검사 소리인지 굴착기 소리인지 알수도 없는데 대충 눌러만 댔다.

(내 바로 전 사람은 도저히 안되겠다 그래서 환불처리 받고 집에 갔다고 한다.)

너무 짧은 문진시간 + 민감한 청력검사를 해야되는데 개판5분전인 병원환경으로 인해 나의 분노는 급상승했고,

아니 누구는 평생 귀가 멀지도 모르는 이 위급한 상황에 이게 지금 말이나 됩니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었을뿐. 대학병원쯤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급한 환자였을거다.)

 

검진결과를 토대로 내린 병명은.

메니에르병.

세상에 돌아버릴듯한 어지러움 + 귀 멍멍함 + 이명 을 동반하는 요상한 질병인데 나는 초반이라 그런지 어지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심약하여, 저 얘기 듣고나니 그때부터 좀 어지러운거 같았음.)

처형의 말씀으로는, 온몸의 모든 병을 낫게 해줄것 같다는 슈퍼 고용량의 스테로이드 5알을 처방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근데 이것도 나중에 찾아보니, 찐 돌발성난청 오신 분들은 하루에 13알도 드시더라.)

 

2020.01.07 (목)

스테로이드를 때려넣어서 그런건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서 그런건지 귀가 많이 나아진게 확 느껴짐.

다 나은건 아니지만, 나을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 순간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닌데. 뭔가 의사 이상한거 같은데. 메니에르 아닌거 같어. 다른데 가봐야겠어. 라면서 서울대병원을 예약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분은 명의셨다. 1분도 안되는 시간에 정확히 내 병명을 맞추신 명의.

괜찮아지겠다 싶어서 우선 서울대병원 예약은 다시 취소했다.

이후로 3일간 스테로이드 5알씩 때려박고, 4일째 3알, 5일째 1알을 먹고 스테로이드는 끝.

 

하지만 나에게 남은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90일분의 이뇨제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시련.

앞으로 식단에 소금No, 설탕No, 매운거No, 커피No, 카페인No, 조미료No, 인공색소No.

그럼 뭘 먹어야 하나요. (지금 먹고 있는것들)

고구마. 생당근. 생오이. 삶은달걀. 사과. 배. 귤. 한라봉. 감말랭이. 맛밤. 쑥떡 등.

쑥떡 같은 경우는 걍 찹쌀 + 쑥밖에 안든거고, 감말랭이 이런것도 감 100% 이런것만 사먹어야 된다.

인터넷에서 당뇨식, 무염식 이런거 찾아보면 생각외로 이렇게 먹는 사람들이 많다.

 

2020.01.09 (금)

스테로이드 5알씩 때려박은지 3일째. 귀는 거의 다 나음.

근데 이상하게 어지러운거 같은 느낌? (평상시에 어지러워 본적이 없어서 어지러운게 뭔지 잘 모름)

그리고 뒷목두통이 도래했다. 두통이긴 두통인데 이게 뒷목 부근에서 느껴진다. (근육통 아님)

그리고 이명 발생.

이명이라는게 평상시에도 원래 들렸던건지, 아닌건지도 분간이 안될 정도로 짜증나고 사람 진 빠지게 만들더라.

그리고 저녁쯤에는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태어나서 자연적인 코피는 3번정도밖에 안 흘려본거 같은데 그중 한번이 이날이었다.

이쯤되면 거의 몸이 맛이 갔다고 할수 있겠다.

 

2020.01.19 (화)

대망의 오늘.

두통과 어지러운 느낌은 없어졌고, 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명은 아직도 남아있음. 스테로이드 먹기 전에는 웅웅~ 하는 저음역대의 이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삐이익~ 하는 고음역대의 이명이 들린다. 날이 갈수록 들리는 하루 중 이명 들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긴 함.

 

메니에르병

짜게 먹으면 생기는 병이란다. 근데 난 평상시에 음식을 짜게 안 먹는다. 미각이 별로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지 간을 추가해서 먹거나 그러지 않는다. 그럼 왜 이 병에 걸린건가.

1. 잦은 음주.

요즘 재택 + 나의아저씨 라는 드라마 보면서 + 할거 없어서 + 심심해서 일주일에 4~5일씩은 맥주를 마셔댔다.

맥주를 마시려면 야식이 있어야겠쥬? 그렇게 거의 매일매일 야식+맥주 파티를 벌였다.

2. 커피

하루에 기본 아메리카노 3잔 이상씩은 마셨고, 많이 마시는 날에는 5~6잔도 마셔댔다.

콜라나 레드불 같은 탄산도 즐겨마시는 편이었다.

3. 스트레스

난 스트레스라는걸 안 받는 사람인줄 알았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저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한의학의 기 같은 느낌인줄.

근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스트레스라는게 진짜 있는거였고, 그걸 받으니 귀가 또 다시 멍해지더라.

스테로이드 먹고 좀 괜찮아진 상황에서, 회사에서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귀가 멍~ 해지더라. 순간 쫄았음.

 

현재 진행상황 (진단 받은지 2주째)

저염식을 넘어서서 무염식으로만 밥 먹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내가 맛을 잘 몰라서 그냥저냥 먹을만 하다. 특히 군고구마 핵존맛.

하루종일 사과, 고구마, 달걀, 토마토 같은거로만 연명중임.

설탕이나 소금은 절대 안 먹고 (자연적으로 재료에 들어있는건 어쩔수 없지), 커피도 안 먹고 술도 안 먹고 있다.

메니에르 초기라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할 필요는 없을거 같지만, 그간 망가진 몸을 리셋하자는 생각에 강하게 하고 있다.

집에 있는 영양제라는 영양제는 모두 다 먹고 있다. 특히 혈액순환제 같은거.

 

메니에르병인가 싶어 이글을 찾은 분들께.

1. 그냥 빨리 대학병원 응급실로 고고. 돌발성 난청은 예약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응급실로 오라고 병원 예약사이트에 써있음.

2. 식단조절은 생각외로 할만함. 미칠정도는 아님.

3. 귀 질환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나 혼자 불편한거라 2배로 짜증나고 힘든데 그렇다고 스트레스 받거나 화내면 더 악화될듯.

4. 인터넷에 떠도는 무슨 한의원이나 노루궁뎅이, 산수유 이런거에 현혹되지 말고 그냥 병원 고. 스테로이드 과다복용 짱짱맨.

 

현재 심정

전혀 억울하지 않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라는 생각따윈 안한다.

언젠가 이럴줄 알았다.

이렇게 맨날 야식먹고 술마시고, 커피 탄산 마시고 단거 좋아하고 초콜렛 입에 달고 살면.

언젠가 이렇게 될줄 난 알고 있었다. 그게 언제 닥치느냐의 문제였을뿐, 언젠가 당할 일이었다.

메니에르 환자가 쓴 글중에 그런 글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암 같은 병이 아니라서. 이 병을 계기로 식단조절도 하고 건강하게 살수 있을거 같다.'

맞는 말인거 같다. 90알의 이뇨제를 다 먹는 3개월 후부터는 다시 평상시처럼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콜라도 먹고 하겠지만.

3개월동안 몸을 좀 정화시키고, 그 이후로는 예전처럼 몸을 막 굴리지는 않을 예정이다. (정확히는 못 굴리겠지.)

진짜 난 언젠가 이꼴날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때 펑펑 놀고 공부 안하면, 수능 망칠거 뻔히 알면서도 공부를 안한 내가,

몸 망가질거 뻔히 알면서 몸관리를 하지는 않았겠지.

Posted by v멍군v
Mung2019. 12. 25. 22:14


1992년인가...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때쯤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 쓰는 이 모든 이야기들의 실체는 없다. 너무 오래되서라기보다는 너무 어릴적 이야기라서 어떤것이 진실이고 어떤것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학년1반.

그 반에는 김인숙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인숙이를 좋아했다.

잘 웃지는 않았지만 하얀 피부와 큰 눈을 가진 인숙이는 참으로 이쁜 아이였다.

모든 철부지 남자애들이 그렇듯, 좋아하는 여자애에게는 더 못살게 굴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 있는 아파트 107동 707호에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그 친구의 집에 갔던거 같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일본옷.. 유카타? 기모노? 같은걸 입고 찍었던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고 나는 인숙이가 일본사람인줄 알았다.

(유치원을 독일 여자애랑 다녀서 더 그렇게 생각한듯)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 친구와 비슷하게 생긴 여동생이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른 친구들이 생겼던 우리는 멀어졌다는 표현보다는 희미해졌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간혹 연락은 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목적인지, 인간관계에 있어 목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알맞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여하튼 그렇게 꽤 오랜시간 과거의 추억들은 뒤로 한채 살아가다가,

고등학교때쯤 다시 몇번 연락하다가 다시 또 연락이 끊겼다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또 연락이 됐다가 끊겼다가를 반복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것은,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인터넷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던 나에게 손편지를 보내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는데,

인숙이는 나에게 꽤나 많은 편지를 써줬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냥 어느 감수성 여린 소녀처럼 손편지를 좋아하는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그 편지를 쓰기 위해 들인 많은 노력은 생각하지 않은채, 인간관계의 소중함은 망각한채 그냥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던 내가 지금와서는 참으로 한심하다.

 

그렇게 다시 연락이 닿아,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간간히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페북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린란드라는 곳에 유학을 가게 된 것을 알았다.

그린란드.

세계지도를 봤을때 (우리가 흔히 보는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한 그 지도), 아프리카와 맞먹는 크기지만 어느 교과서에도 자세히 나오지 않던 그 나라. 그린란드.

실제 크기는 아프리카보다 14배 이상 작다고 한다. (맞나?)

여하튼 세계일주 코스를 짤 때도 전혀 고려도 안했고, 쳐다도 안 봤던 유럽 서쪽 위에 있던 미지의 나라.

그곳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그린란드에 간 이후로는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가고 싶었던 극지연구소에서 일을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고, 뭔가 그린란드 전통옷을 입고 있던 사진을 봤던 기억만 난다.

(지금은 극지연구소 가라 그래도 못 갈거 같다. 나이 들어서 추우면 기력이 딸린다.)

그리고 그린란드 사람과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헐?)

 

얼마 전. 

얼마 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했네. 꽤 오래전.

그린란드에 관한 책 한권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이것도 걍 페북 통해서 주워들음.)

아는 사람이 책을 낸 경우는 드문 일이라, 언젠가 사서 봐야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찮게 그 책을 발견했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쓴 책이다.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읽었다.

여행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린란드에 살고 있는 친구이므로 여행기라기보다는, 그린란드에 대한 소개와 실제 그곳의 생활을 담은 책이었다.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난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친구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고, 이제까지 그런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보다는, 연락을 받는게 익숙해져 있었고,

매년 1월1일만 되면 쏟아지는 새해안부 인사에 답장만 할뿐,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안부인사를 해본적이 없다.

 

2020년 1월 1일 0시 0분.

카카오톡 폭주로 인해 장애가 터진 그 시점에, 카톡의 폭발적인 트래픽을 모니터링하면서 나는 그저 놀라웠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안부인사를 묻는건가? 

근데 왜 나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를 건네본 적이 없는거지?

부끄러웠다. 그저 나 혼자 고고한척 살아왔던거 같다.

누군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저 낯부끄럽고 비굴한 일이었다.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도, 예전부터 그래왔으니 뭐 사람이 쉽게 변하나. 라는 썩어빠진 생각으로 변함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와도 괜찮았다.

수십명은 아니지만, 매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았고, 언제 한번 봐야지. 언제 밥이나 먹자고. 라는 말을 끝으로 사람들과의 대화방은 1년동안 긴 수면에 들어갔다.

 

이 친구의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란다는건.

외모를 치장하거나, 대화거리를 준비하거나, 하다못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동호회 활동 같은 것도 하지 않은채, 방 구석에 홀로 앉아

진정한 나를 (나도 알지 못하는 진정한 나를 누가 알아봐주냐.)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거라는 망상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2020년 올해에는,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해 안부 인사를 보냈다.

뒤이어 글을 쓰겠지만, 그 연락을 계기로 몇년만에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눈 친구도 있고,

카톡으로나마 매우 반가워하며 근황을 나눈 사람들도 있다.

물론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우르스와 리카르도에게는 아직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제 해야지.

Posted by v멍군v
Mung2019. 7. 16. 14:59

여행을 다녀와서, 너무나도 운이 좋게 푸르덴셜생명보험 이라는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여행을 하면서 했던 수많은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수많은 서류탈락과 면접탈락의 고배를 마시지도 않은 채, 거의 바로 취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6년동안 일을 했다.

개발자로써 2년동안 일을 했고, 이후에는 직군을 바꿔 시스템 운영자로써 4년간 일을 해왔다.

IT를 하는 누군가에게는 꿈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정적이면서도 큰 일이 없으면 정년이 보장되는 금융권 IT였다.

입사할때는 그런것까지 따질 여력이 없어 몰랐지만, 입사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다.

 

그렇게 2013년부터 시작된 나의 푸르덴셜생명보험 회사 생활은 6년이라는 시간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물론 6년동안 꽤나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다.

다솜이와 한솔이도 태어났고, in서울 입시는 실패했으나 in서울 아파트 장만은 성공했다.

그리고 진희는 전 회사 짝퉁같은 이름의 일본계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내가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정신승리를 하게 만드는 무슨.. 뭐라드라.. CRO? 뭐 이상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제일 친한 친구를 보험설계사의 길로 안내했다가, 크게 상처받고 떠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멀고 더디게만 느껴지지만, 지나간 시간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빠르다.

그렇게 내 인생의 황금같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수없이 이직을 꿈꿔왔다.

이직을 위한 꿈이 아닌, 현재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난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싶어 몸부림 치는 것처럼 이직시도를 했다.

거의 매년 새로운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고, 개중에는 대학시절에도 별로 안 겪어본 서류광탈의 아픔을 준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입사날짜까지 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생각으로 입사포기를 했었다.

'이 정도 의지라면, 이 회사에서 더 열심히 자기계발을 할 수 있을거고, 그러다보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고 나도 알다시피 나의 의지는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

입사포기를 하고 한동안은 열심히 하다가, 또 다시 현실에 안주하여 주어진 일을 반복하고 살았으며,

간혹 괜찮은 성과를 내기라도 하면, 주변의 칭찬에 현혹되어 '그래, 이정도면 뭐 이 회사에서 나름 입지를 굳힌거 아니겠어?'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매년 그랬지만, 올해에도 수많은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LG전자를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다녀온 그때를 떠올렸다.

어떤 회사에서는 매우 높게 평가해주는 반면, 어떤 회사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 인생에 있어 꽤나 잘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평가하는 누군가에 의해 평가절하 되었을때,

그것을 끝까지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가치 있는 여행이었는지 알어?" 라고 하기에는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그냥 막연히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것을 직접 해봤고, 다양한 곳을 가봤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대단한 일을 한거야.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내가 과연 자기 자리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버텨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을 배워왔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찌보면 난 그저 운 좋게도, 꽤나 여유있는 와이프와 결혼한 덕분에 아무생각 없이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그게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지내온 사람들보다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반대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것이 순전히 나의 능력으로만 다녀온 것인가?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았지만, 운이 나빠 행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고작 세계일주를 다녀왔다는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된다면, 그것 자체로도 불공평한거 아닐까?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까?

그때의 진희는 무슨 생각으로 나의 뜻에 함께 해줬을까?

 

이제는 어떤 순서로 어떤 나라를 갔는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죽을때까지 올해 했던 여행에 관한 저 생각들은 계속하게 될 것 같다.

세계일주라는건, 내 인생에 있어 한번의 이벤트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입사한지 6년차다.

모두가 말하는것처럼 뻔하디 뻔한 3,6,9의 법칙을 일부러 어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6년차가 된 지금, 난 그것을 순응하기로 결심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닌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어디선가 들은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2019년 7월 29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안녕 푸르덴셜.

안녕 카카오.

Posted by v멍군v
Mung2019. 3. 4. 22:45

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서인지, 잦은 음주로 인한 기억력의 감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1년쯤... 이름만 전산반이지, 소위 잘 나가고는 싶지만 놀줄은 모르는 찐따들이 모인 써클놀이를 신나게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선배가 주는 소주를 스댕컵에 반쯤 채워 마셨다.


첫 술의 기억은 강렬했다.

아주아주 어릴적, 할아버지가 주셨던 소주 맛의 기억보다도 더 쓰고 맛이 없었다.


그 이후로 할일 없던 우리들은, 매우 자주 술을 마셨다.

개중에는 쎈척하고 싶어 술을 마시는 친구도 있었고, 

친구들이 술을 마시니까 따라서 마시는 부류도 있었으며, 

그리고 나처럼 나는 남들과 다르다. 라는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남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으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술 마시는 것 따위로 난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도 있었다.



스댕컵 반잔의 소주 이후로 처음 술을 마신 것은, 학교 뒷산의 테니스장이었다.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달빛을 조명삼아 술을 마셨다.

글로 적으니까 운치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완전 개판이었다. 동네 망나니 샛기들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던 주인공만 나오는 드라마를 봤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들이마셨고,

결국 필름이 나간 것은 물론, 몸을 전혀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경련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일이 커진것을 직감한 선배들이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가 야밤에 학교로 택시를 타고 오셨고.

수십명의 고등학생들이 공사장 안전제일 표지판에 시체 하나를 싣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경찰 아저씨들이,

경찰차에 나를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한다.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못 시작됐다.

그때 무용담을 늘어놓을 철 없는 생각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이후로도 몇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달에 한두번씩은 꼭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나면 꼭 필름이 나가서 친구들이 집까지 들쳐매고 데려다줬다.

술이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일탈이 재밌었고, 우리들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부는 쥐뿔도 안해서 힘들것 하나 없는 인생들이었지만, 인생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듯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재밌었다.



그렇게 거의 18년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8년동안, 필름이 끊어진 것만 100번이 넘는거 같다.

친구들끼리 술을 배우다보니, 완전 잘못 배워서 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마셨다하면 항상 필름이 나갔다.


술이라는게 참 친해지기 쉬운 수단 중의 하나다.

아무런 노력없이 술만 마시면 친해지는 것이,

흡사 아무런 노력없이 특별해지고 싶어 술을 마시는 나의 과거와 너무 닮아 있었다.

친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은,

특별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던 내 모습이었다.


사실 술 때문에 이득 본 것도 꽤 많다.

회사에 들어오고나서, 왠만한 술자리는 끝까지 남아서 선배들을 보필하는 수준은 됐다.

남들보다 잘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빼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술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해주는 선배들이 대다수였다.

술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르고 쉽게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난 술이라는게, 그렇게 크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주 옛날처럼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시는것도 아니고, 그냥 다음날 좀 속이 안 좋을 정도로 마시는거 정도 쯤이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십대가 되고, 이제 그 삼십대의 반환점을 지나가고 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항상 순대국에 소주 한병을 마시는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고,

냉장고에는 항상 500짜리 맥주캔과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지루했던 날이라서,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500짜리 맥주 한캔만 마신 날이면, 조금 마셨다고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거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고,

보통 두캔씩은 마시고 잠이 들었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혼자 있는 날이었다.

와이프가 애들을 데리고 처가라도 가있거나, 와이프가 늦게 오는 날이면,

혼자서 마음껏 술 마실 생각에 엄청 들뜨곤 했다.


이쯤 되니 스스로도 알콜중독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진 않았지만, 이미 퇴근길에는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 좀 많이 마신거 같네. 이제 좀 줄여볼까.

라는 생각이 이틀도 채 가지 않은채, 어느새 티비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줄여야겠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난 의지가 박한 사람이다. 진심으로 느껴야지만 실행에 옮길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한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인 사람이다.

사실 이런것조차 핑계 삼아, 술을 안 마실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 술을 못 끊을테니까. 라는 이상한 궤변으로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2019년 2월 27일이었다.

뭐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회식날이긴 했지만 회사에 문제가 생겨 남들은 모두 집에 가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만 2차에 갈때쯤 합류하던 그런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특별히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다 눈을 떴을때,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날 막던 와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또 필름이 나갔네. 큰일이구만.

이라는 생각보다 더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건.

안경.


난 아주 어릴적부터 안경을 써왔고, 지금도 눈이 많이 나쁜 편이라 정확히 한뼘을 넘어서는 것들은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여행을 다닐때도 가장 우선으로 챙긴것이 안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술 마시고 뭘 잃어버린 적도 거의 없긴 하지만, 특히 안경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다.

안경이 없으면 한발자국도 걸을수가 없으니 당연한거겠지.


그런 내가 안경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잠깐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잘 모르겠다.


꽤 큰 충격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이 특별히 안 좋지도 않았는데... 안경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갈때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건 몰라도,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통제를 놔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수 없었으면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2019년 2월 27일부로. 금주를 하고자 한다.

한두잔이 아닌, 그냥 아예 술을 입에 안 대려고 한다.

사실 요즘 회사에서도 종교적인 이유든, 건강상의 이유든 술 한잔 입에 안 대는 사람들도 많고, 다들 사회생활 잘한다.

사회생활이라는건 사실 핑계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계였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위한 술은... 흠...

사실 여행을 다닐때에도 술 덕분에 즐거웠던 날이 훨씬 많았다.

술로 인해 안 좋은 날보다는 즐거웠던 날이 더 많았다.

영국에서 처음 콜롬비아 친구들을 사귀때도 The frog 펍의 맥주 덕분에 친해졌고,

유럽일주를 할때도 궤짝으로 싣고 다니던 맥주덕분에 우리의 감정은 더욱 풍부해졌다.

남미여행을 할때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한잔씩 마시는 맥주는 여행의 묘미였다.

... 얘기하다보니 좋은데? 끊지 말까?...

아니다. 술을 안 마시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만날때마다 술 마시는것 빼곤 뭐 해본게 없는 친구들에게는 뭐라 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근데 술 안 마신다고 멀어질거 같았으면, 진작 멀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사실 지금도 두렵다.

알콜성 치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그렇게 진행됐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잦은 블랙아웃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두렵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건,

이러한 내 스스로의 다짐이 오래가지 못해, 이런 자리에서 한잔 쯤이야 뭐 어쩔수 없지 라는 나약한 생각으로 바뀔까봐 두렵다.



많이 두려웠는지,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결론은,

이제까지 한번도 생각 안해본 금주를 할 예정이다.

한달뒤, 그리고 반년뒤, 그리고 일년뒤에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리뷰할테니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한다.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