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g2019. 3. 4. 22:45

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서인지, 잦은 음주로 인한 기억력의 감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1년쯤... 이름만 전산반이지, 소위 잘 나가고는 싶지만 놀줄은 모르는 찐따들이 모인 써클놀이를 신나게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선배가 주는 소주를 스댕컵에 반쯤 채워 마셨다.


첫 술의 기억은 강렬했다.

아주아주 어릴적, 할아버지가 주셨던 소주 맛의 기억보다도 더 쓰고 맛이 없었다.


그 이후로 할일 없던 우리들은, 매우 자주 술을 마셨다.

개중에는 쎈척하고 싶어 술을 마시는 친구도 있었고, 

친구들이 술을 마시니까 따라서 마시는 부류도 있었으며, 

그리고 나처럼 나는 남들과 다르다. 라는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남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으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술 마시는 것 따위로 난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도 있었다.



스댕컵 반잔의 소주 이후로 처음 술을 마신 것은, 학교 뒷산의 테니스장이었다.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달빛을 조명삼아 술을 마셨다.

글로 적으니까 운치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완전 개판이었다. 동네 망나니 샛기들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던 주인공만 나오는 드라마를 봤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들이마셨고,

결국 필름이 나간 것은 물론, 몸을 전혀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경련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일이 커진것을 직감한 선배들이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가 야밤에 학교로 택시를 타고 오셨고.

수십명의 고등학생들이 공사장 안전제일 표지판에 시체 하나를 싣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경찰 아저씨들이,

경찰차에 나를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한다.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못 시작됐다.

그때 무용담을 늘어놓을 철 없는 생각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이후로도 몇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달에 한두번씩은 꼭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나면 꼭 필름이 나가서 친구들이 집까지 들쳐매고 데려다줬다.

술이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일탈이 재밌었고, 우리들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부는 쥐뿔도 안해서 힘들것 하나 없는 인생들이었지만, 인생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듯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재밌었다.



그렇게 거의 18년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8년동안, 필름이 끊어진 것만 100번이 넘는거 같다.

친구들끼리 술을 배우다보니, 완전 잘못 배워서 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마셨다하면 항상 필름이 나갔다.


술이라는게 참 친해지기 쉬운 수단 중의 하나다.

아무런 노력없이 술만 마시면 친해지는 것이,

흡사 아무런 노력없이 특별해지고 싶어 술을 마시는 나의 과거와 너무 닮아 있었다.

친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은,

특별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던 내 모습이었다.


사실 술 때문에 이득 본 것도 꽤 많다.

회사에 들어오고나서, 왠만한 술자리는 끝까지 남아서 선배들을 보필하는 수준은 됐다.

남들보다 잘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빼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술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해주는 선배들이 대다수였다.

술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르고 쉽게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난 술이라는게, 그렇게 크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주 옛날처럼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시는것도 아니고, 그냥 다음날 좀 속이 안 좋을 정도로 마시는거 정도 쯤이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십대가 되고, 이제 그 삼십대의 반환점을 지나가고 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항상 순대국에 소주 한병을 마시는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고,

냉장고에는 항상 500짜리 맥주캔과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지루했던 날이라서,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500짜리 맥주 한캔만 마신 날이면, 조금 마셨다고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거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고,

보통 두캔씩은 마시고 잠이 들었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혼자 있는 날이었다.

와이프가 애들을 데리고 처가라도 가있거나, 와이프가 늦게 오는 날이면,

혼자서 마음껏 술 마실 생각에 엄청 들뜨곤 했다.


이쯤 되니 스스로도 알콜중독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진 않았지만, 이미 퇴근길에는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 좀 많이 마신거 같네. 이제 좀 줄여볼까.

라는 생각이 이틀도 채 가지 않은채, 어느새 티비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줄여야겠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난 의지가 박한 사람이다. 진심으로 느껴야지만 실행에 옮길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한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인 사람이다.

사실 이런것조차 핑계 삼아, 술을 안 마실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 술을 못 끊을테니까. 라는 이상한 궤변으로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2019년 2월 27일이었다.

뭐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회식날이긴 했지만 회사에 문제가 생겨 남들은 모두 집에 가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만 2차에 갈때쯤 합류하던 그런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특별히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다 눈을 떴을때,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날 막던 와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또 필름이 나갔네. 큰일이구만.

이라는 생각보다 더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건.

안경.


난 아주 어릴적부터 안경을 써왔고, 지금도 눈이 많이 나쁜 편이라 정확히 한뼘을 넘어서는 것들은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여행을 다닐때도 가장 우선으로 챙긴것이 안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술 마시고 뭘 잃어버린 적도 거의 없긴 하지만, 특히 안경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다.

안경이 없으면 한발자국도 걸을수가 없으니 당연한거겠지.


그런 내가 안경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잠깐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잘 모르겠다.


꽤 큰 충격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이 특별히 안 좋지도 않았는데... 안경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갈때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건 몰라도,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통제를 놔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수 없었으면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2019년 2월 27일부로. 금주를 하고자 한다.

한두잔이 아닌, 그냥 아예 술을 입에 안 대려고 한다.

사실 요즘 회사에서도 종교적인 이유든, 건강상의 이유든 술 한잔 입에 안 대는 사람들도 많고, 다들 사회생활 잘한다.

사회생활이라는건 사실 핑계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계였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위한 술은... 흠...

사실 여행을 다닐때에도 술 덕분에 즐거웠던 날이 훨씬 많았다.

술로 인해 안 좋은 날보다는 즐거웠던 날이 더 많았다.

영국에서 처음 콜롬비아 친구들을 사귀때도 The frog 펍의 맥주 덕분에 친해졌고,

유럽일주를 할때도 궤짝으로 싣고 다니던 맥주덕분에 우리의 감정은 더욱 풍부해졌다.

남미여행을 할때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한잔씩 마시는 맥주는 여행의 묘미였다.

... 얘기하다보니 좋은데? 끊지 말까?...

아니다. 술을 안 마시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만날때마다 술 마시는것 빼곤 뭐 해본게 없는 친구들에게는 뭐라 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근데 술 안 마신다고 멀어질거 같았으면, 진작 멀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사실 지금도 두렵다.

알콜성 치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그렇게 진행됐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잦은 블랙아웃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두렵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건,

이러한 내 스스로의 다짐이 오래가지 못해, 이런 자리에서 한잔 쯤이야 뭐 어쩔수 없지 라는 나약한 생각으로 바뀔까봐 두렵다.



많이 두려웠는지,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결론은,

이제까지 한번도 생각 안해본 금주를 할 예정이다.

한달뒤, 그리고 반년뒤, 그리고 일년뒤에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리뷰할테니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한다.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