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g2022. 1. 23. 15:36

생각해보니 벌써 한 30년쯤 전, 국민학교 3학년때쯤이었던것 같다.


사촌형과 함께 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엄청나게 커다란 박스들을 주섬주섬 푸시면서, 이것저것 선을 연결해주기 시작하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 첫 컴퓨터 이름은 현대 솔로몬 486DX 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인치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14인치쯤 되는 배불뚝이 CRT모니터가 함께 있었고.

함께 왔었는지 나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HP 500K인가 하는 잉크프린터도 함께였다.


컴퓨터를 설치할 책상도 없었던지라,

안에 모형꽃이 가득 들어있던, 내 무릎정도 되는 테이블 위에 설치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컴퓨터 가격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최고급 사양의 맥북보다도 비쌌을것이다.

내가 첫 컴퓨터를 갖게 되고도, 몇년 후에 나왔던 세종대왕이나 진돗개니 하는 컴퓨터들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으니,

내 솔로몬 486DX는 더 비쌌을것이다.

단순히 짜장면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와 비교만 해봐도, 그 당시 컴퓨터의 가격은 지금돈으로 천만원은 넘지 않았을까 싶다.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부모님이 왜 그렇게 거금을 들여서 컴퓨터를 사주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컴퓨터를 사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천리안이라는 통신도 연결해주셨다.

그 당시 통신이란 것은 전화선을 이용하는 것이라, 통신하는 동안에는 집전화가 계속 통화중이었다.

그래서 다른 집들은 통신을 못하게 했다던데, 우리집은 내 방에 전화선을 새로 하나 따줄만큼 적극적이셨다.

사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왜 그렇게까지 해주셨는지 잘 모르겠다.


또래들 중 그 누구보다 빠르게 컴퓨터를 접하고, 통신을 접한 나는 컴퓨터를 좋아할수밖에 없게 됐다.

누구보다 특별하게 살고 싶었지만 노력은 하기 싫었던 나에게 있어서 컴퓨터란,

그 누구보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었다.


한때 학교에서 통신 바람이 불때, 반에서 친하지 않던 어떤 여자애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우리집에서 통신하게 해줄수 있어?

사실 통신을 하려면 천리안에 돈도 내야되고, 모뎀도 있어야되고, 뭐 이래저래 해줘야 되지만 난 그런걸 알리가 없었다.

그저 집에 있는 컴퓨터를 보니, 전화기 뒤에서 선 하나를 빼서 컴퓨터 모뎀에 꽂고, 컴퓨터에서는 천리안을 실행시키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 여자애의 집에 초대받아, 통신을 설치해주기 시작했다.

전화기가 필요하다는 나의 말에, 그 여자애의 어머님께서 손으로 돌리는 옛날전화기를 갖다 주셨고,

전화기 뒤에 선이 한개밖에 연결이 안되는 것을 보고 패닉에 빠진 나는,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통신을 하게 해달라고 말한 그 여자애나, 내가 해주겠다면서 그집에 찾아간 나나, 그런 나를 믿고 지켜봐주시던 그 어머님 모두 황당하기 그지 없지만.

하여튼 나는 그렇게 주변에서는 컴퓨터를 제일 잘하는 친구였다.


사실 어릴때 컴퓨터를 접한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에게 있어서도 컴퓨터란 여러가지 게임을 골라서 할수 있는 게임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를 사면, 수백개의 게임을 깔아주는게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매일 어떤 게임을 해볼까 고르면서 시간이 흘러갈 때쯤, 컴퓨터를 좀더 과학적으로 접근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갔었다.

옛날에는 교보문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컴퓨터 코너가 있었다.

그곳에는 정품게임들과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난 당연히 안사주실거라 생각하면서, 게임 하나를 집어서 사달라고 말을 꺼냈고.

놀랍게도 엄마는 아무말 없이 사주셨다. 그 당시 가격이 4만9천원쯤? 엄청나게 고가의 게임이었다.


그 당시 왜 엄마가 아무말 없이 사주셨는지 몰랐다. 당연히 안사주실거라 생각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서점에 따라와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셨던건 아닐까 싶다.


여하튼 그렇게 비싼 게임. 팔콤사에서 만든 영웅전설4 라는 게임을 들고 집에 와서 실행을 시키려는데.

게임이 실행되지 않았다.

어느덧 내 컴퓨터는 나이가 들어, 그런 최신의 게임을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웠던 것이다.

그 당시 통신에서 이런저런 글들을 찾고, CPU가 뭔지 RAM이 뭔지 Disk가 뭔지 공부하고 가상메모리가 뭔지 왜 실행이 안되는건지 몇일동안 계속해서 찾아봤던거 같다.

그냥 게임을 못하는 것이 속상했다기보다는, 엄마가 거금을 들여 흔쾌히 사주셨는데 그게 실행이 안된다는 사실이 더 슬펐던거 같다.


그렇게 꽤 오랜시간동안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컴퓨터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가상메모리 확인하는법, 늘리는법, OS단에서 셋팅하는 법 등등 원리는 모르지만, 이것저것 시도를 해봤었고.

결국 난 영웅전설4의 첫 화면을 보게 되었다.

그 첫 화면이 떴을 때의 그 희열감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겪은 저 성공경험은, 어린 나에게 컴퓨터 말고 다른 것을 업으로 생각할수 있게끔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당연히 컴퓨터를 업으로 삼게 될 사람이었고, 그 외의 것은 거의 생각해본적이 없다.


10여년쯤 전, 인턴생활을 할때 멘토에게 했던 푸념이 생각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IT를 업으로 택한건 억울한거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야근도 해야되고, 계속해서 신기술은 나오고 있으니 공부도 해야되고,

그렇다고 대우가 좋은것도 아닌데 왜 IT를 업으로 택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멘토분의 말도 기억이 난다.

스스로 고칠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상황 안에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생각하시는게 더 생산적일것 같네요.

그렇게 한때는 이렇게 평생 살아갈수 있을까? 나에게 주5일제는 꿈같은 일인가?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개발자 몸값은 하늘을 모르고 치솟으면서, 주변에는 IT를 배워 중고신입으로 입사하고 싶다는 사람들과,

판교에 대한 환상같은 소리도 들려오고, 국비학원 6개월만 다니면 어디든 취업할 수 있다는 말 등등.

강산이 한번 바꼈을 뿐인데, IT에 대한 인식은 3D업종에서 가장 핫한 직업군이 되어버렸다.


별 생각 없이, 그냥 30년전 부모님이 사주신 486 컴퓨터 한대로 인해 컴퓨터만 해오던 나 역시도,

무슨 미래에 대한 대단한 혜안이 있고, 4차혁명을 미리 예견하고, 한가지 분야만 꾸준히 뚝심 있게 판 사나이가 되어버려,

이 상승장에 휩쓸리게 되었다.


내가 별다르게 노력을 한 것은 없다.

대단한 꿈을 품었던 적도 없고, 미래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던 적도 없다.

그저 30년전 나와 함께 영웅전설4 첫 화면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현대 솔로몬 486DX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