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후 살아남기2015. 11. 12. 17:03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나에겐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내적으로는 많은 삶의 변화가 있었지만, 겉으로 봐서는 그냥 똑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귀국하자마자 다른 회사에 바로 입사할 수 있었고,


게다가 더 운이 좋아서, LG전자 1년 경력까지 인정받고 들어갔다.


결국 지금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들과 얼추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 31살에 대리를 달았으니까, 여행하고 잠시 쉰 1년반의 공백기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페이스다.



그랬다.


나에게 있어서 세계일주라는 경험은, 너무나 큰 자극제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특히 세계일주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날때에는,


무조건 가라고만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짧아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왜 굳이 다니기 싫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고 계세요.


왜요.


돈도 있고, 시간도 낼수 있는데 왜 떠나기를 망설이고 계신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나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아무런 문제 없을거에요.


다녀온 후의 걱정이요?


그거 다 주변에서 질투에 어린 시기로 하는 말들이에요. 신경 끄라고 하세요.


다녀온 후에도 잘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요. 저를 보세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잖아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거에요. 다녀오세요.



사실이었다.


다녀온 것을 후회한적도 없고, 남이 간다고 하는데 절대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내가 하나 크게 착각한게 있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 이렇게 된 것뿐이라는걸...


가장 큰걸 까먹고 있었다.


난 내가 노력해서 재취업을 바로 한것도 아니고, 내가 뛰어나서 1년반을 쉬고도 페이스를 따라잡은게 아니었는데...


그냥 결과적으로 봤을때, 그렇게 됐다고 해서 남들에게도 아무 생각 없이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한거였다.



대기업을 그만둬봤고, 또 여행도 가봤고... 그러다보니,


가끔 회사사람들 중 얘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고민은 비슷했다.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걸 하고 싶다. 여행 다녀오면 어때요? 어떻게 그만두게 됐어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만두세요. 세상은 넓고 회사는 많아요. 여행을 가세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말에 힘입어...


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 내 말이 뭐 그리 큰 영향력이 있다고 내 말에 힘을 입겠나...


여하튼 나와 그런 얘기들을 나누고 퇴사를 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보면..


죄책감이 밀려온다.



왠지 내가 한 말 때문에... 무지하게 운이 좋았던 나의 모습 때문에,


그들이 퇴사를 결정하고 다른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조차 내 잘난척일수도 있고, 이런 걱정도 전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내심 내 맘 한구석에는 죄책감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계속될수록,


나는 그저 사람들 틈에 녹아들어, 그냥 그들중한명 으로만 살아가고 싶어진다.



입사를 한지 2년반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여행을 다녀온지도 2년반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말이겠지.


2년반동안 열심히 일했다.


일을 잘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근무시간으로만 따진자면 항상 상위권이었다.


그런 삶이 잘못 됐다는 것도 알고, 그렇게 살기 싫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항상 많은 차이가 있으니까, 어쩔수 없이, 이렇게 핑계를 대면서, 용기가 없어서 야근하고 주말출근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진급평가를 받는데, 심사관이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명수씨는 회사를 오래 다닐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 분은 2년반전에 내가 입사면접을 볼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분이었다.


왜일까.


2년반동안 왠만한 사람들보다는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해줬다.


그런데 왜 2년반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신걸까...



사람들은 의외로 세계일주 다녀온걸 별로 탐탁치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그게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회사 들어온 사람중에 개판으로 다니다가 퇴사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본인들이 회사생활을 할때는 정말 회사에 올인 했었는데, 요즘 애들은 워크앤라이프 밸런슨가 뭔가가 더 중요하다며,


자꾸 회사밖의 생활들을 즐기는게 영 마음에 안 드실수도 있다.


아니면 개인적으로 봤을때, 진심으로 내가 회사생활을 대충대충 하고 있다고 보여졌을 수도 있다.



잘 모르겠다.


여행을 다녀왔을때만 해도 정말 내 인생의 방향이 확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정말 뭔가 다르게 살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거 같다.


남들과 다르게 살수 있는 용기는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게 아닌거 같다.


더 노력하고 고민해야지 얻을 수 있는거 같은데,



사실 이제는 그 용기가 생길까봐 겁이 난다.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