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g2018. 10. 26. 21:45

2007년 9월 17일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잉? 이러면서 사귄게 아닌 관계로 정확히 우리가 언제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애매하다.

그냥. 우리는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사귀게 됐다. 는 뻥이고,

나의 강려크한 의지와, 진희의 수동적인 의지가 결합하여 사귀게 됐다.


그럼 9월 17일은 어떻게 나온 날짜냐면,

시간이 좀 흐르고 기념일을 챙겨야 해서 언제부터 사귄건지 거꾸로 계산하다보니, 내가 처음 진희를 본 그날. 새벽에 사자머리를 

한 나를 진희가 주운 그날이 9월 17일이었다.

선물만큼이나 중요한게 당일이었다.

우선 뭐 애들은 본가에 맡기면 되니까 저녁을 예약하기로 했다.


예약이라.

나에게는 정말 너무나도 어색한 단어다.

평생 예약이라는걸 해본게 손에 꼽힐 정도로 되는대로 살아온 나였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거 먹고, (보통 떡볶이 아니면 돈까스임)

졸리면 눈에 보이는 곳에서 자던게 나다.

그런 내가 예약을 했다.

예약하는 전화는 장인어른에게 전화 드리는 것보다 어색했던거 같다.

예약하기 전 엄청나게 검색을 하고, 뭘 어떻게 말해야하는지 스크립트도 대충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예약한 곳은 랩24 라는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게 될 파인 레스토랑이었다.

결혼하고나서는 물론 연애하면서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고오오오급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단일메뉴 단가로 치면,

경주 옆 감포라는 곳에서, 진희가 나를 꼬시기 위해 사준 자연산 참돔이 최고긴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뭔가 격식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진희는 간지나는 영국계, 스웨덴계 제약회사를 다니며 이런 곳을 꽤나 다녀본 모양이다.

가끔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는 쉐프들의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했다고 말하곤 했다.

회식이라 하면 치맥 아니면 삼쏘밖에 모르던 나에게 진희가 자랑하는 그런 사진들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리고 소주도 팔지 않는 그런 레스토랑들은 사실 나의 관심 밖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히 진희가 안가본 파인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에드워드킴 쉐프가 운영하는 랩24였다.

청담에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예약할때는 메르디앙 호텔로 옮긴 후였다.

2명 예약을 하고 (깨알같이 10주년이니 케잌 좀 달라고 하고) 한숨을 돌리니 그날이 다가왔다.

전날 진희 몰래 차 트렁크에 샤넬백을 숨겨놓고,당일에는 애들을 엄마에게 맡긴채 메르디앙 호텔로 향했다.

그저 매년 있던 기념일 정도로 알던 진희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난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이런거에 설레여 하기에는, 애 둘을 책임져야하는 육아는 그리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메르디앙 주차장에 들어가는 마지막까지, 진희는 그저 호텔 부페에 가는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본인이 분명 전날 호텔 부페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는데도, 내가 부페를 데리고 가는줄 알고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랩24에 들어갔다.

고생한 진희를 위해 무조건 제일 비싼걸로 골랐다. 아무리 비싸봤자 샤넬백 악세사리 가격의 근처에도 못가니까 상관 없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전, 내가 쓴 편지를 줬다.

난 개인적으로 최고의 선물은 직접 만들거나, 손으로 쓴 편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선물을 고르는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직접 만들거나 쓰다보면 그 시간동안은 오롯이 상대방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난 상대방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수제나 손편지가 가장 좋다고 믿는다.


물론 이건 백프로 개인적인 생각임.

상대방 입장은 생각해본적 없음.


여하튼 편지를 읽다가 갑자기 진희가 오열을 한다.

말 그대로 오열을 한다.

뭐지;; 이제까지 숱하게 써온 각서와 반성문에 기울인 노력의 1/10도 안 들인 저 편지가 뭐 그렇게 슬프지?


정말 펑펑 울고 있는데 서빙하시는 분이 오셨다.

오열하고 있는 여자와 실실 쪼개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계시길레 걍 주셔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너무 울어서 순간 나랑 10년이나 알고지낸게 그렇게 서러운가 오해할 정도였다. 물론 오해 아닐수도 있음.


그렇게 눈물을 추스리고 음식을 먹다가,

사실 메인요리는 기억도 안날만큼, 정말 다양하고 많은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들이 쏟아져나왔다.

개중에는 엄청 맛있는것도 있었으나, 무미한 맛도 있었다. 다 내 입이 싸구려라 그런거겠지.

드디어 대망의 선물 증정식 시간이 다가왔다.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중한 그것을 들고 진희에게 갖다줬고,

그것을 본 진희는 10년간 본 것중에, 가장 놀란 표정으로 그 것을 반겼다.

아니구나. 내가 본 진희의 가장 놀란 표정은,

예전에 내가 대구에 몰래 갔었던 때였던거 같다.

분명 약사라고 하긴 한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거 같아서,

직접 확인하고자 몰래 대구에 가서, 진희가 일하고 있는 약국에 잠입했다.

그리고는 박카스 한병 주세요.

라고 말하고 계산해주다가 나를 발견한 그때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주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두려웠다.

큰 돈을 쓰기 전에는 꼭 서로 상의해야한다는 우리만의 약속을 어기기도 했고, 빚도 남아있는 상태에서 저딴거에 돈을 썼다고 혼날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만 기억해두세요.

샤넬백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이게 뭐야. 미쳤어. 어머. 뭐야. 를 남발하며 샤넬백을 풀어본 진희는, 명품백 하나 없는 티를 내며 가방을 곧바로 다시 포장했고 집에 가서 본다고 했다.


남은 식사시간은 예상했던 것처럼,

이 백 하나를 사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랑하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샤넬백을 손에 넣은 진희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거 같다.


여하튼.

그렇게 꽤나 공 들인. 남들은 별거 아니라 생각할수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믿지 않을만큼 오랜 시간, 많은 정성을 들인 이벤트가 끝이 났다.


어쩌다보니 만난지 11주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됐다.

만난지 11주년에는 언제나처럼 손편지를 줬고, 준비한 선물은 아직 도착을 안했다. (벌써 한달이 넘었는데요?)

어렸을적엔,

어렸을적도 아니지... 처음 회사에 입사했던 27살때만 하더라도,

34살먹은 주임, 대리님들을 보면서 와 완전 아저씨다.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혼한지 10년째 됐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결혼 언제 하셨는지 기억도 안나시겠네요. 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비록 결혼은 아니지만 난 여전히 10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마치 어제일과 같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시간의 모습, 냄새, 소리 모든 것 하나하나 시간이 멈춘듯이 기억이 난다.

근데 문제는 진짜 어제일은 기억이 잘 안남.


오늘은 우리가 만난지 4058일째 밤이다.

지금도 지 성질을 못이겨서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는 한솔이와, 그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다솜이와의 고군분투 중인 진희에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만난지 3672일째 되던 날, 진희에게 딸린 식솔들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만난지 10주년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 하자.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