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7일.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됐던 날들의 중반을 지나가는 날짜.
아주 어릴적부터 큰아찌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긴 했으나, 내 의지와 노력은 롤모델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내 10대와 20대 초반.
별 의지도,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만을 허비하며 보내온 나의 학창시절의 마지막은,
1점대의 학점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런 미래도 꿈꾸지 않고 있는 나약한 내 모습이었다.
어찌보면 도피처로 삼은,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운이 좋았던 나의 영국행.
영국에서의 3개월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나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영국을 발판 삼아 다음단계로 나아갔던 곳.
2007년 9월 14일. 인도 뉴델리 공항.
2년의 군생활보다 더 많은 시행착오와 감정의 기복과 내가 이런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나도 모르던 나를 발견한 2일의 시간.
2일간의 멘붕을 벗어나고자 즉흥적으로 결정한 북인도행.
그리고 우연과 우연의 거듭 끝에 탑승한 2007년 9월 17일. 다람살라를 지나가고 있던 버스.
거기서 나는 진희의 발가락과 첫 조우를 하게 된다.
한국분이세요? 라는 첫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의 2달동안 같이 여행을 했다.
그리고 진희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나는 만난지 100일 기념선물인 한국행 비행기표를 들고, 2007년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진희와 한국에서의 연을 이어가게 된다.
나보다 100점은 높은 수능점수를 갖고 있는 진희는 말 그대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안정된 직장. 높은 연봉. 확실한 미래. 끊임없는 자기계발.
그에 반해 나의 위치는,
자퇴가 나을것 같은 학점. 불안한 수준을 넘어선 절망이 확실해 보이는 미래. 점점 무력해지고 있는 하루하루.
학교에 다시 복학하고 나서 했던 생각은 항상 똑같았다.
저 사람에 걸맞는 사람이 되자.
내가 대학교수가 될게 아니라면, 최소한 S대기업정도는 다니자. 그래야지 어디가서 레벨 좀 맞다고 하겠지.
나 스스로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수 있는 3년간의 대학생활이었지만,
사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건 진희였다.
X축, Y축도 분간 못하는 멍청한 놀자공대생을 옆에 두고 수학, 물리, 영어를 열심히 가르쳐준게 진희였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이태원에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PC방에 가서 나는 게임을 하고, 옆자리에서 나 대신 영어로 된 대학물리학 과제를 열심히 풀고 설명해준게 진희였다.
허구헌날 숙취에 시달리고 열악한 자취밥 먹다가 골병이 든 나를 위해,
이브프로펜과 지금은 판매중지 당한 코싹을 추천해준 것도 진희였다.
지금은 아프리카에서도 쓰지 않을것 같은 가방을 들고, 머리 깎는게 귀찮다고 삭발을 하고 다니고,
옷 고르는 것도 귀찮아서 콜롬비아에서 선물받은 관광객용 티셔츠와 인도에서 입던 옷을 입고 다니는 나를 위해,
가방이며 신발이며 옷이며 시계며 온갖 것들을 선물해준게 진희였다.
늦잠 자는 나를 깨우기 위해 50번씩 전화를 하고, 학교는 가고 있냐 공부는 하고 있냐 니가 지금 제정신이냐 등등
엄마도 하지 않는 잔소리를 해주던게 진희였다.
자소서는 물론 영어로 된 Resume까지 하나씩 첨삭해주던것도 진희였다.
그렇게 3년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마른자리 진자리 어르고 달래고 우쭈쭈 우쭈쭈 오냐오냐 화내고 때리고 하면서 사람답게 만들어준게 진희였다.
그렇게 3년간 각고의 고생 끝에.
난 S대기업은 물론 수많은 기업들을 골라서 취업할 수 있는 초특급 인재가 되었으나, 여전히 빈곤했다.
이미 모든 축의금을 다 뿌려서 받을 일만 남은 진희에 반해, 난 내가 제일 먼저 결혼해서 받은 축의금을 뿌릴 일만 남았었고,
만기가 된 적금은 물론 보험까지 갖고 있던 진희에 반해, 난 이제 갓 겨우 초회보험료를 내는 새내기 회사원이었고,
자차를 끌고 팔공산을 누비며 면허 갱신까지 한 진희에 반해, 난 여전히 아빠차를 몰래 타는 수준이었다.
만난지 14일째 되던 날, 인도 빠하르간지에서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다음 편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