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대망의 배타는 날 아침이 밝아왔다.


3박4일간 아무것도 하는일 없이, 밥 먹고 잠만 자면 되는 그런 배다.


인터넷도 안되고, 아무것도 할게 없으므로...


우리는 배를 타기 일주일 전쯤부터 온갖 게임과 음악과 책을 다운 받아서 탑승했다.


수능 D-100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3박4일을 스페인어 집중학습기간으로 정하여 공부하기로 했다.


근데 결국 배에서 한거라곤 잠잔거밖에 없음.ㅎ





요기가 나비막 사무실이다.


한 건물 안에 나비막이랑 오스트랄?인가 뭔가하는 또 다른 배 회사가 있다.


다른 회사는 그냥 이 주변만 왔다갔다 거리는 진짜 유람선이고...


우리가 타는건 몬뜨-나탈레스 화물을 운반해주는 장거리 화물선.ㅎ





아무리 비수기라 하더라도 표는 간지나게 뽑아준다.


보면 둘째줄에 AA라고 적혀있는데... 이건 무려.. 우리가 자는 방의 등급이 AA라는 뜻이다.


가장 좋은 AAA다음이 우리가 타는 AA다. 그 밑으로는 A-B-BB-C-CC-CCC등... 후질근한 방들이 많다.


사실 그냥 말이 AA일 뿐... 우리가 타는 아마데오라는 배는 AA밖에 없다. ㅡ_ㅡ


좀더 관광객을 위한 에반겔리스타스라는 배는 온갖 종류의 선실이 있어서 선택이 가능한데...


우리는 그냥 AA를 탈수밖에 없다. 또 AA라는게 별거 없다. 비린내 나는 6인용 도미토리일 뿐이다.ㅡ_ㅡ 


(원래 우리는 벙커C라고 불리우는 28명이 같이 자는 방을 쓰려고 했었다.ㅎㅎ)





3박4일간 주구장창 먹기만 할거 같아서 마켓에서 사온 음식들이다.


빵, 쿠키, 콜라는 당연히 챙기고 비장의 무기인 바카디 모히또도 사들고 탔는데...


아숩게도 배 안에서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다. ㅡ_ㅡ


망할... 그리고 별로 마시고 싶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저것들을 사기 위해 쏟아지는 폭우 속을 30분 넘게 해치고 마켓에 다녀온건데...


배에서 워낙 밥이랑 간식들이 잘 나와서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진희.


계속해서 말하지만 이건 화물선이지 유람선이 아니기 때문에, 입장도 이렇게 간지나게 한다.


누가 보면 새우잡이배에 끌려가는 줄 알겠네.


손님을 위한 배려 따윈 없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난 나한테 일 안 시킨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비는 오고, 비린내는 나고, 화물 옮기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갑판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화물선이다. 유람선이 아니다. 지루할거다. 괜찮겠냐. 라는 말을 수십번 들었지만,


진짜 이런 레얄 화물선일줄은 몰랐다.


아니면 최소한 관광객이랑 일하는 사람들 구분정도는 해줄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없다.


형광색 옷을 입으면 직원이고, 아니면 관광객이다.ㅎ




 


주로 차를 운송하는 배 같았다.


사진에는 없지만, 롤스로이스 팬텀 오픈카도 실려 있었다. ㅡ_ㅡ


그리고 특이한 점은... 홍합이랑 조개를 엄청 많이 실어간다.


분명히 목적지인 뿌에르또 나탈레스도 항구도시일텐데... 왜 몬뜨에서 홍합을 가져가는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차랑 해산물이 메인 화물이고, 사람이 서브 화물인거 같았다.





처음 배에 올라타자마자 우리를 반긴건 언빌리버블한 점심식사.


엊그제 예약할때 직원이, 첫날 점심은 안 주니까 알아서 준비하라 그래서 머핀을 준비해갔는데,


그냥 타자마자 밥을 준다.


이 얼마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밥상인지 모르겠다.


3박4일동안 밥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잘 나왔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아닐때에는 식당에 항상 간식거리가 완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식사 시간이 아닐때에는 잠만 쳐잤지.





밥을 먹고나면 이 배에서 유일하게 정해진 스케쥴인, 안전교육 비디오를 시청한다.


뭐라뭐라 그러면서 대피요령도 설명해주고 비상용 보트 사용법도 알려주고 한다.


자꾸 옛날에 본 타이타닉이 생각나서 가끔씩 마음을 졸였다.


타이타닉 볼때는, 바닷물에 빠져서 얼어죽고 뭐 생난리를 치길래....


'멍청한놈들. 추우면 얼마나 춥다고. 그냥 헤엄쳐서 나무판자라도 하나 잡으면 살겠구만...' 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짜 추운 동네 와보니 왜 죄다 죽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여기만 와도 추워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타이타닉처럼 빙하가 있는 곳이면 정말 얼어죽었겠지?


그나마 우리가 타는 배는 해안선을 따라서 가는 배라서, 여차하다가 침몰되도 금방 구조될거라는 희망에 맘 편히 잤다.





우리가 3박4일동안 묵게 된 방이다.


원래 6인실인데, 사람이 없는 관계로 우리와 네덜란드 커플, 이렇게 4명이서만 방을 썼다.


근데 이 망할 양키놈들이 구석탱이의 좋은 침대를 잡고나서, 우리에게 선심 쓰듯이 사진에 보이는 4개의 침대를 다 써도 상관 없단다.


니가 말 안해도 그럴라고 했어 이 새킈야!!!


그래서 우리는 각자 1층에서 자고, 2층은 짐 보관용도로 썼다.


나름 뭐...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따뜻하고 괜찮았다.


비린내가 많이 나고 청결상태가 매우 더러웠던거만 빼면.... 매우 만족스러운 침대였다.





우리 옆으로 보이는 에반겔리스타스 배다.


저기 배의 왼쪽위에 보이는 빨간건 잠수함이다.


희한하게 이 항구에 있는 대부분의 배들은 잠수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관광객을 위한건지, 업무용으로 쓰는건지...


여하튼 우리배는 그런거 없다. 그냥 화물선이다. 





갑판? 뭐 그런것도 없고... 그냥 선실 나와서 보면 이런 풍경이다.


저 차들은 전부 주인이 없던데... 누가 옮기는거고 왜 옮기는건지도 모르겠다.


가이드도 없고, 관광객 따윈 손님이 아닌 짐으로 생각하는 배라서,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저렇게 앞치마 두르고 있으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근데 일하는 사람들도 처음 타봤는지, 연신 사진 찍고 밖에서만 돌아다니고 있더라...


혹시 모르지.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 관광객이었을지도...


여하튼 타는 사람이 거의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나름 12명정도의 손님이 탑승했다.


나, 진희, 네덜란드 커플, 프랑스 노부부, 프랑스 젊은부부, 포르투칼 청년, 멕시코 아가씨, 그리고 어디나라 사람인지 모를 부부+아기.


아. 총 13명이구나.





12시에 배를 타고, 짐 풀고 밥 먹고 구경 좀 하다가 4시가 되니 배가 출발하기 시작한다.


저 조그만 배가 큰 우리 배를 밧줄로 연결한 다음에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나갈 채비를 도와준다.


저게 말로만 듣던 도선사인가 보다... 우리나라 연봉 1위라 하던데...


여하튼 타이타닉처럼 뭐 유람선 떠날때 항구에서 손 흔들고 우리도 갑판에서 손 흔들고 그런 풍경은 없다.


다들 쓸쓸하게 저 배만 쳐다보고 있었다.





항구에는 죄다 이런 화물선만 가득했다.


이 배도 곡물을 운송하는 화물선인데... 잘 보면 배 왼쪽 끝에 잠수함이 매달려 있다.;;;


무슨 용도로 달고 다니는건지 모르겠네...


배가 출발하길래 저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손도 흔들고 막 그랬는데... 다들 무시하더라.


망할 놈들. 관광객 기분 좀 내겠다는데 그걸 하나 못 맞춰주나.





아마도 이 사진에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랑 얘기해본 사람들 전부인거 같다.


가장 오른쪽에 세계일주중인 포르투칼 청년이 우리를 많이 챙겨줬다.


쭈글쭈글 거리는 우리에게 말도 잘 걸어주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해주고....


우리와 같이 방을 쓰는 네덜란드 커플은 첫인상부터 빡치더니, 끝날때까지 빡치게 만들었다.


아오. 게다가 나중에는 네덜란드 커플이랑 같이 토레스 델 파이네 투어도 했다.





이제 슬슬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큰 배인데도 생각보다 빠르더라.


태평양으로 나가는건 아니고, 그냥 대륙쪽에 딱 붙어서 얌전히 달린다.


가끔 운이 좋으면 고래를 볼수 있다고 하던데...


우리는 고래는 못 봤고, 물개인지 돌고래인지 뭔지 모를 것들만 계속 봤다.ㅎ





배에서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아침 8~9시까지 아침식사.


다시 취침.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식사.


식당에 모여서 영화 시청.


오후 7시~8시까지 저녁식사.


다시 취침.


이게 그냥 하루 일과다. 보통 영화는 스페인어 자막이 나오는 영화들인데...


이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서, 중국영화나 지네나라 영화만 틀어대서 우린 볼수가 없었다.ㅎㅎ


덕분에 그냥 잠만 주구장창 잤음.


둘째날인가 셋째날에는, 같이 방 쓰는 네덜란드 애가 진희에게 나 어디 아픈거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로 계속 잠만 잤음.



사진은 포르투칼 청년이 가지고 다니는 짜랑고 뮤직비디오다.


내가 짜랑고를 들고 다니는걸 네덜란드 남자놈이 봤고, 그 남자놈이 포르투칼 청년과 얘기하다가


'우리방에 있는 원숭이가 짜랑고를 들고 다닌다.' 라고 말해버렸고,


평소 짜랑고를 사랑하던 포르투칼 청년은 저 DVD(라고 써있지만 화질은 비디오)를 들고 나를 찾아 다녔다.


나를 보자마자 짜랑고 있냐고, 짜랑고 칠줄 아냐고, 자기는 짜랑고 좋아한다고, 근데 못 친다고... 블라블라 뭐라뭐라 계속 얘기한다.


크흥.. 그냥 기념품 삼아 산겁니다. C코드도 제대로 못 쳐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나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길래 시크하게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러다가 나를 위해 짜랑고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바람에, 방에서 쉬지도 못하고 저 이상한 비디오만 계속 봤음.




 


이게 우리가 앞으로 3박4일간 움직일 루트다.


지도에서 가장 위에 빨간 형광펜으로 칠한 곳이 출발지인 뿌에르또 몬뜨고...


그렇게 빨간선을 쭉 따라서 내려오다가, 중간에 아주 잠깐 태평양 지역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쭉~~ 내려와서 가장 아래 빨간 형광펜으로 칠해진 뿌에르또 나탈레스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예전에 영국에 처음 갔을때, 지하철에서 전단지 한장을 주워서 읽었었는데...


그 전단지는 호화 유람선인 엘리자베스 2세에 관한 거였다.


그때 집에서 호화 유람선의 가격에 대해 검색해보고는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라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잊고 살다가, 이번 여행을 하면서 도전해봤다.


물론 호화 유람선은 커녕 유람선도 아닌, 그냥 화물선이지만.... 그래도 나름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나중에, 매우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호화 크루즈를 타고 세계일주를 해야지.

 

Posted by v멍군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