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g2019. 12. 25. 22:14


1992년인가...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때쯤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지금 쓰는 이 모든 이야기들의 실체는 없다. 너무 오래되서라기보다는 너무 어릴적 이야기라서 어떤것이 진실이고 어떤것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학년1반.

그 반에는 김인숙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인숙이를 좋아했다.

잘 웃지는 않았지만 하얀 피부와 큰 눈을 가진 인숙이는 참으로 이쁜 아이였다.

모든 철부지 남자애들이 그렇듯, 좋아하는 여자애에게는 더 못살게 굴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 있는 아파트 107동 707호에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한번 그 친구의 집에 갔던거 같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일본옷.. 유카타? 기모노? 같은걸 입고 찍었던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고 나는 인숙이가 일본사람인줄 알았다.

(유치원을 독일 여자애랑 다녀서 더 그렇게 생각한듯)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 친구와 비슷하게 생긴 여동생이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른 친구들이 생겼던 우리는 멀어졌다는 표현보다는 희미해졌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간혹 연락은 했지만 정확히 무엇이 목적인지, 인간관계에 있어 목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알맞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여하튼 그렇게 꽤 오랜시간 과거의 추억들은 뒤로 한채 살아가다가,

고등학교때쯤 다시 몇번 연락하다가 다시 또 연락이 끊겼다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또 연락이 됐다가 끊겼다가를 반복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것은,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인터넷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던 나에게 손편지를 보내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는데,

인숙이는 나에게 꽤나 많은 편지를 써줬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냥 어느 감수성 여린 소녀처럼 손편지를 좋아하는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그 편지를 쓰기 위해 들인 많은 노력은 생각하지 않은채, 인간관계의 소중함은 망각한채 그냥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던 내가 지금와서는 참으로 한심하다.

 

그렇게 다시 연락이 닿아,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간간히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페북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린란드라는 곳에 유학을 가게 된 것을 알았다.

그린란드.

세계지도를 봤을때 (우리가 흔히 보는 메르카토르 도법에 의한 그 지도), 아프리카와 맞먹는 크기지만 어느 교과서에도 자세히 나오지 않던 그 나라. 그린란드.

실제 크기는 아프리카보다 14배 이상 작다고 한다. (맞나?)

여하튼 세계일주 코스를 짤 때도 전혀 고려도 안했고, 쳐다도 안 봤던 유럽 서쪽 위에 있던 미지의 나라.

그곳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그린란드에 간 이후로는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가고 싶었던 극지연구소에서 일을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고, 뭔가 그린란드 전통옷을 입고 있던 사진을 봤던 기억만 난다.

(지금은 극지연구소 가라 그래도 못 갈거 같다. 나이 들어서 추우면 기력이 딸린다.)

그리고 그린란드 사람과 결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헐?)

 

얼마 전. 

얼마 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했네. 꽤 오래전.

그린란드에 관한 책 한권을 썼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이것도 걍 페북 통해서 주워들음.)

아는 사람이 책을 낸 경우는 드문 일이라, 언젠가 사서 봐야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찮게 그 책을 발견했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쓴 책이다.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읽었다.

여행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린란드에 살고 있는 친구이므로 여행기라기보다는, 그린란드에 대한 소개와 실제 그곳의 생활을 담은 책이었다.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난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친구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고, 이제까지 그런 삶을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하기보다는, 연락을 받는게 익숙해져 있었고,

매년 1월1일만 되면 쏟아지는 새해안부 인사에 답장만 할뿐,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안부인사를 해본적이 없다.

 

2020년 1월 1일 0시 0분.

카카오톡 폭주로 인해 장애가 터진 그 시점에, 카톡의 폭발적인 트래픽을 모니터링하면서 나는 그저 놀라웠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안부인사를 묻는건가? 

근데 왜 나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안부를 건네본 적이 없는거지?

부끄러웠다. 그저 나 혼자 고고한척 살아왔던거 같다.

누군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저 낯부끄럽고 비굴한 일이었다.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도, 예전부터 그래왔으니 뭐 사람이 쉽게 변하나. 라는 썩어빠진 생각으로 변함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와도 괜찮았다.

수십명은 아니지만, 매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받았고, 언제 한번 봐야지. 언제 밥이나 먹자고. 라는 말을 끝으로 사람들과의 대화방은 1년동안 긴 수면에 들어갔다.

 

이 친구의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길 바란다는건.

외모를 치장하거나, 대화거리를 준비하거나, 하다못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동호회 활동 같은 것도 하지 않은채, 방 구석에 홀로 앉아

진정한 나를 (나도 알지 못하는 진정한 나를 누가 알아봐주냐.)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도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거라는 망상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2020년 올해에는,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해 안부 인사를 보냈다.

뒤이어 글을 쓰겠지만, 그 연락을 계기로 몇년만에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눈 친구도 있고,

카톡으로나마 매우 반가워하며 근황을 나눈 사람들도 있다.

물론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우르스와 리카르도에게는 아직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제 해야지.

Posted by v멍군v
Mung2019. 7. 16. 14:59

여행을 다녀와서, 너무나도 운이 좋게 푸르덴셜생명보험 이라는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여행을 하면서 했던 수많은 고민이 무색해질 정도로,

수많은 서류탈락과 면접탈락의 고배를 마시지도 않은 채, 거의 바로 취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6년동안 일을 했다.

개발자로써 2년동안 일을 했고, 이후에는 직군을 바꿔 시스템 운영자로써 4년간 일을 해왔다.

IT를 하는 누군가에게는 꿈의 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정적이면서도 큰 일이 없으면 정년이 보장되는 금융권 IT였다.

입사할때는 그런것까지 따질 여력이 없어 몰랐지만, 입사하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다.

 

그렇게 2013년부터 시작된 나의 푸르덴셜생명보험 회사 생활은 6년이라는 시간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물론 6년동안 꽤나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다.

다솜이와 한솔이도 태어났고, in서울 입시는 실패했으나 in서울 아파트 장만은 성공했다.

그리고 진희는 전 회사 짝퉁같은 이름의 일본계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내가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정신승리를 하게 만드는 무슨.. 뭐라드라.. CRO? 뭐 이상한 일을 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제일 친한 친구를 보험설계사의 길로 안내했다가, 크게 상처받고 떠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멀고 더디게만 느껴지지만, 지나간 시간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빠르다.

그렇게 내 인생의 황금같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수없이 이직을 꿈꿔왔다.

이직을 위한 꿈이 아닌, 현재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난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싶어 몸부림 치는 것처럼 이직시도를 했다.

거의 매년 새로운 회사에 입사 지원을 했고, 개중에는 대학시절에도 별로 안 겪어본 서류광탈의 아픔을 준 곳도 있고,

어떤 곳은 입사날짜까지 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생각으로 입사포기를 했었다.

'이 정도 의지라면, 이 회사에서 더 열심히 자기계발을 할 수 있을거고, 그러다보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모두가 알고 나도 알다시피 나의 의지는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

입사포기를 하고 한동안은 열심히 하다가, 또 다시 현실에 안주하여 주어진 일을 반복하고 살았으며,

간혹 괜찮은 성과를 내기라도 하면, 주변의 칭찬에 현혹되어 '그래, 이정도면 뭐 이 회사에서 나름 입지를 굳힌거 아니겠어?'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매년 그랬지만, 올해에도 수많은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LG전자를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다녀온 그때를 떠올렸다.

어떤 회사에서는 매우 높게 평가해주는 반면, 어떤 회사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내 인생에 있어 꽤나 잘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를 평가하는 누군가에 의해 평가절하 되었을때,

그것을 끝까지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가치 있는 여행이었는지 알어?" 라고 하기에는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그냥 막연히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것을 직접 해봤고, 다양한 곳을 가봤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 대단한 일을 한거야.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내가 과연 자기 자리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도 버텨낸 사람들보다도 많은 것을 배워왔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찌보면 난 그저 운 좋게도, 꽤나 여유있는 와이프와 결혼한 덕분에 아무생각 없이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그게 하루하루 힘든 일상을 지내온 사람들보다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반대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것이 순전히 나의 능력으로만 다녀온 것인가?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았지만, 운이 나빠 행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데, 고작 세계일주를 다녀왔다는 것이 플러스 요인이 된다면, 그것 자체로도 불공평한거 아닐까?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을까?

그때의 진희는 무슨 생각으로 나의 뜻에 함께 해줬을까?

 

이제는 어떤 순서로 어떤 나라를 갔는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마도, 내가 죽을때까지 올해 했던 여행에 관한 저 생각들은 계속하게 될 것 같다.

세계일주라는건, 내 인생에 있어 한번의 이벤트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평생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입사한지 6년차다.

모두가 말하는것처럼 뻔하디 뻔한 3,6,9의 법칙을 일부러 어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6년차가 된 지금, 난 그것을 순응하기로 결심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닌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어디선가 들은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2019년 7월 29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안녕 푸르덴셜.

안녕 카카오.

Posted by v멍군v
Mung2019. 3. 4. 22:45

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서인지, 잦은 음주로 인한 기억력의 감퇴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1년쯤... 이름만 전산반이지, 소위 잘 나가고는 싶지만 놀줄은 모르는 찐따들이 모인 써클놀이를 신나게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선배가 주는 소주를 스댕컵에 반쯤 채워 마셨다.


첫 술의 기억은 강렬했다.

아주아주 어릴적, 할아버지가 주셨던 소주 맛의 기억보다도 더 쓰고 맛이 없었다.


그 이후로 할일 없던 우리들은, 매우 자주 술을 마셨다.

개중에는 쎈척하고 싶어 술을 마시는 친구도 있었고, 

친구들이 술을 마시니까 따라서 마시는 부류도 있었으며, 

그리고 나처럼 나는 남들과 다르다. 라는 중2병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남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으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술 마시는 것 따위로 난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도 있었다.



스댕컵 반잔의 소주 이후로 처음 술을 마신 것은, 학교 뒷산의 테니스장이었다.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달빛을 조명삼아 술을 마셨다.

글로 적으니까 운치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완전 개판이었다. 동네 망나니 샛기들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던 주인공만 나오는 드라마를 봤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들이마셨고,

결국 필름이 나간 것은 물론, 몸을 전혀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경련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일이 커진것을 직감한 선배들이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가 야밤에 학교로 택시를 타고 오셨고.

수십명의 고등학생들이 공사장 안전제일 표지판에 시체 하나를 싣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경찰 아저씨들이,

경찰차에 나를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한다.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못 시작됐다.

그때 무용담을 늘어놓을 철 없는 생각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이후로도 몇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달에 한두번씩은 꼭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나면 꼭 필름이 나가서 친구들이 집까지 들쳐매고 데려다줬다.

술이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일탈이 재밌었고, 우리들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부는 쥐뿔도 안해서 힘들것 하나 없는 인생들이었지만, 인생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듯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재밌었다.



그렇게 거의 18년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8년동안, 필름이 끊어진 것만 100번이 넘는거 같다.

친구들끼리 술을 배우다보니, 완전 잘못 배워서 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마셨다하면 항상 필름이 나갔다.


술이라는게 참 친해지기 쉬운 수단 중의 하나다.

아무런 노력없이 술만 마시면 친해지는 것이,

흡사 아무런 노력없이 특별해지고 싶어 술을 마시는 나의 과거와 너무 닮아 있었다.

친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은,

특별해지기 위해 해야하는 노력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서 술을 마시던 내 모습이었다.


사실 술 때문에 이득 본 것도 꽤 많다.

회사에 들어오고나서, 왠만한 술자리는 끝까지 남아서 선배들을 보필하는 수준은 됐다.

남들보다 잘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빼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술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해주는 선배들이 대다수였다.

술 때문에 남들보다 더 빠르고 쉽게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난 술이라는게, 그렇게 크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주 옛날처럼 인사불성으로 술을 마시는것도 아니고, 그냥 다음날 좀 속이 안 좋을 정도로 마시는거 정도 쯤이야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삼십대가 되고, 이제 그 삼십대의 반환점을 지나가고 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항상 순대국에 소주 한병을 마시는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렸고,

냉장고에는 항상 500짜리 맥주캔과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날이라서,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지루했던 날이라서,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500짜리 맥주 한캔만 마신 날이면, 조금 마셨다고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거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고,

보통 두캔씩은 마시고 잠이 들었다. 가끔 특별한 날에는 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것보다 더 문제는, 혼자 있는 날이었다.

와이프가 애들을 데리고 처가라도 가있거나, 와이프가 늦게 오는 날이면,

혼자서 마음껏 술 마실 생각에 엄청 들뜨곤 했다.


이쯤 되니 스스로도 알콜중독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진 않았지만, 이미 퇴근길에는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요즘 좀 많이 마신거 같네. 이제 좀 줄여볼까.

라는 생각이 이틀도 채 가지 않은채, 어느새 티비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줄여야겠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난 의지가 박한 사람이다. 진심으로 느껴야지만 실행에 옮길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한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가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의지박약인 사람이다.

사실 이런것조차 핑계 삼아, 술을 안 마실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 술을 못 끊을테니까. 라는 이상한 궤변으로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2019년 2월 27일이었다.

뭐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회식날이긴 했지만 회사에 문제가 생겨 남들은 모두 집에 가고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만 2차에 갈때쯤 합류하던 그런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특별히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다 눈을 떴을때,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날 막던 와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또 필름이 나갔네. 큰일이구만.

이라는 생각보다 더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건.

안경.


난 아주 어릴적부터 안경을 써왔고, 지금도 눈이 많이 나쁜 편이라 정확히 한뼘을 넘어서는 것들은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여행을 다닐때도 가장 우선으로 챙긴것이 안경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술 마시고 뭘 잃어버린 적도 거의 없긴 하지만, 특히 안경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다.

안경이 없으면 한발자국도 걸을수가 없으니 당연한거겠지.


그런 내가 안경을 잃어버렸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잠깐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잘 모르겠다.


꽤 큰 충격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이 특별히 안 좋지도 않았는데... 안경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갈때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다른건 몰라도,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통제를 놔버렸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수 없었으면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2019년 2월 27일부로. 금주를 하고자 한다.

한두잔이 아닌, 그냥 아예 술을 입에 안 대려고 한다.

사실 요즘 회사에서도 종교적인 이유든, 건강상의 이유든 술 한잔 입에 안 대는 사람들도 많고, 다들 사회생활 잘한다.

사회생활이라는건 사실 핑계다.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계였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위한 술은... 흠...

사실 여행을 다닐때에도 술 덕분에 즐거웠던 날이 훨씬 많았다.

술로 인해 안 좋은 날보다는 즐거웠던 날이 더 많았다.

영국에서 처음 콜롬비아 친구들을 사귀때도 The frog 펍의 맥주 덕분에 친해졌고,

유럽일주를 할때도 궤짝으로 싣고 다니던 맥주덕분에 우리의 감정은 더욱 풍부해졌다.

남미여행을 할때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한잔씩 마시는 맥주는 여행의 묘미였다.

... 얘기하다보니 좋은데? 끊지 말까?...

아니다. 술을 안 마시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겠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만날때마다 술 마시는것 빼곤 뭐 해본게 없는 친구들에게는 뭐라 해야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근데 술 안 마신다고 멀어질거 같았으면, 진작 멀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사실 지금도 두렵다.

알콜성 치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 그렇게 진행됐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잦은 블랙아웃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두렵다.

그것보다 더 두려운건,

이러한 내 스스로의 다짐이 오래가지 못해, 이런 자리에서 한잔 쯤이야 뭐 어쩔수 없지 라는 나약한 생각으로 바뀔까봐 두렵다.



많이 두려웠는지,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결론은,

이제까지 한번도 생각 안해본 금주를 할 예정이다.

한달뒤, 그리고 반년뒤, 그리고 일년뒤에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리뷰할테니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한다.










Posted by v멍군v
Mung2018. 10. 26. 21:45

2007년 9월 17일이 다가왔다.

우리는,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잉? 이러면서 사귄게 아닌 관계로 정확히 우리가 언제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애매하다.

그냥. 우리는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사귀게 됐다. 는 뻥이고,

나의 강려크한 의지와, 진희의 수동적인 의지가 결합하여 사귀게 됐다.


그럼 9월 17일은 어떻게 나온 날짜냐면,

시간이 좀 흐르고 기념일을 챙겨야 해서 언제부터 사귄건지 거꾸로 계산하다보니, 내가 처음 진희를 본 그날. 새벽에 사자머리를 

한 나를 진희가 주운 그날이 9월 17일이었다.

선물만큼이나 중요한게 당일이었다.

우선 뭐 애들은 본가에 맡기면 되니까 저녁을 예약하기로 했다.


예약이라.

나에게는 정말 너무나도 어색한 단어다.

평생 예약이라는걸 해본게 손에 꼽힐 정도로 되는대로 살아온 나였다.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거 먹고, (보통 떡볶이 아니면 돈까스임)

졸리면 눈에 보이는 곳에서 자던게 나다.

그런 내가 예약을 했다.

예약하는 전화는 장인어른에게 전화 드리는 것보다 어색했던거 같다.

예약하기 전 엄청나게 검색을 하고, 뭘 어떻게 말해야하는지 스크립트도 대충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다.


내가 예약한 곳은 랩24 라는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보게 될 파인 레스토랑이었다.

결혼하고나서는 물론 연애하면서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고오오오급 레스토랑이었다.


물론 단일메뉴 단가로 치면,

경주 옆 감포라는 곳에서, 진희가 나를 꼬시기 위해 사준 자연산 참돔이 최고긴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뭔가 격식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진희는 간지나는 영국계, 스웨덴계 제약회사를 다니며 이런 곳을 꽤나 다녀본 모양이다.

가끔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오는 쉐프들의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했다고 말하곤 했다.

회식이라 하면 치맥 아니면 삼쏘밖에 모르던 나에게 진희가 자랑하는 그런 사진들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리고 소주도 팔지 않는 그런 레스토랑들은 사실 나의 관심 밖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히 진희가 안가본 파인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에드워드킴 쉐프가 운영하는 랩24였다.

청담에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예약할때는 메르디앙 호텔로 옮긴 후였다.

2명 예약을 하고 (깨알같이 10주년이니 케잌 좀 달라고 하고) 한숨을 돌리니 그날이 다가왔다.

전날 진희 몰래 차 트렁크에 샤넬백을 숨겨놓고,당일에는 애들을 엄마에게 맡긴채 메르디앙 호텔로 향했다.

그저 매년 있던 기념일 정도로 알던 진희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난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이런거에 설레여 하기에는, 애 둘을 책임져야하는 육아는 그리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메르디앙 주차장에 들어가는 마지막까지, 진희는 그저 호텔 부페에 가는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본인이 분명 전날 호텔 부페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는데도, 내가 부페를 데리고 가는줄 알고 분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랩24에 들어갔다.

고생한 진희를 위해 무조건 제일 비싼걸로 골랐다. 아무리 비싸봤자 샤넬백 악세사리 가격의 근처에도 못가니까 상관 없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전, 내가 쓴 편지를 줬다.

난 개인적으로 최고의 선물은 직접 만들거나, 손으로 쓴 편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선물을 고르는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직접 만들거나 쓰다보면 그 시간동안은 오롯이 상대방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난 상대방에게 내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수제나 손편지가 가장 좋다고 믿는다.


물론 이건 백프로 개인적인 생각임.

상대방 입장은 생각해본적 없음.


여하튼 편지를 읽다가 갑자기 진희가 오열을 한다.

말 그대로 오열을 한다.

뭐지;; 이제까지 숱하게 써온 각서와 반성문에 기울인 노력의 1/10도 안 들인 저 편지가 뭐 그렇게 슬프지?


정말 펑펑 울고 있는데 서빙하시는 분이 오셨다.

오열하고 있는 여자와 실실 쪼개고 있는 남자 사이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계시길레 걍 주셔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너무 울어서 순간 나랑 10년이나 알고지낸게 그렇게 서러운가 오해할 정도였다. 물론 오해 아닐수도 있음.


그렇게 눈물을 추스리고 음식을 먹다가,

사실 메인요리는 기억도 안날만큼, 정말 다양하고 많은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들이 쏟아져나왔다.

개중에는 엄청 맛있는것도 있었으나, 무미한 맛도 있었다. 다 내 입이 싸구려라 그런거겠지.

드디어 대망의 선물 증정식 시간이 다가왔다.

잠깐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 소중한 그것을 들고 진희에게 갖다줬고,

그것을 본 진희는 10년간 본 것중에, 가장 놀란 표정으로 그 것을 반겼다.

아니구나. 내가 본 진희의 가장 놀란 표정은,

예전에 내가 대구에 몰래 갔었던 때였던거 같다.

분명 약사라고 하긴 한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거 같아서,

직접 확인하고자 몰래 대구에 가서, 진희가 일하고 있는 약국에 잠입했다.

그리고는 박카스 한병 주세요.

라고 말하고 계산해주다가 나를 발견한 그때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실 그것을 주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두려웠다.

큰 돈을 쓰기 전에는 꼭 서로 상의해야한다는 우리만의 약속을 어기기도 했고, 빚도 남아있는 상태에서 저딴거에 돈을 썼다고 혼날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만 기억해두세요.

샤넬백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이게 뭐야. 미쳤어. 어머. 뭐야. 를 남발하며 샤넬백을 풀어본 진희는, 명품백 하나 없는 티를 내며 가방을 곧바로 다시 포장했고 집에 가서 본다고 했다.


남은 식사시간은 예상했던 것처럼,

이 백 하나를 사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랑하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샤넬백을 손에 넣은 진희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을거 같다.


여하튼.

그렇게 꽤나 공 들인. 남들은 별거 아니라 생각할수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믿지 않을만큼 오랜 시간, 많은 정성을 들인 이벤트가 끝이 났다.


어쩌다보니 만난지 11주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됐다.

만난지 11주년에는 언제나처럼 손편지를 줬고, 준비한 선물은 아직 도착을 안했다. (벌써 한달이 넘었는데요?)

어렸을적엔,

어렸을적도 아니지... 처음 회사에 입사했던 27살때만 하더라도,

34살먹은 주임, 대리님들을 보면서 와 완전 아저씨다.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혼한지 10년째 됐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결혼 언제 하셨는지 기억도 안나시겠네요. 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비록 결혼은 아니지만 난 여전히 10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마치 어제일과 같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시간의 모습, 냄새, 소리 모든 것 하나하나 시간이 멈춘듯이 기억이 난다.

근데 문제는 진짜 어제일은 기억이 잘 안남.


오늘은 우리가 만난지 4058일째 밤이다.

지금도 지 성질을 못이겨서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는 한솔이와, 그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다솜이와의 고군분투 중인 진희에게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


만난지 3672일째 되던 날, 진희에게 딸린 식솔들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만난지 10주년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 하자.

Posted by v멍군v
Mung2018. 8. 29. 22:55

2017년 9월 17일이 다가왔다.


나는 뭐를 해야할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10년간 매년 있던 기념일이지만 이번만큼은 언제나처럼 넘어가기 싫었다.


언제나처럼이라 하면 어떤것일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귀차니즘 때문에 몇일 뒤에 기념일을 챙겨준거?


대충 뭘 좋아할까 고민하고, 요 근래 무슨 얘기를 했었나 되짚어 가면서 선물을 고른거?


근데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회사에 여성여성스러운 동료가 몇 있었다.


그 동료들에게 꽤나 많이 물어봤다.


와이프가 원래 시계를 좋아하는걸 알고 있었으므로, (근데 그 좋아하는 시계라고 해봤자, 갖고 있는거라곤 DKNY뿐)


까르띠에 뭐드라.. 무슨 발롱블루였나? 무슨 블루 들어간 제품이었는데 비쌌다.


그렇지. 비쌌다.


아무리 명품이고 뭐고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머릿속으로 까르띠에를 만들고 있는 코쟁이 장인들을 떠올려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웃긴게 비싼거 한번 보고나서, 가격 낮춰서 다른 모델을 보면 눈에도 안 들어오더라.


그래서 패스.


가방? 가방을 사줄까? 그치. 빽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고 했어.


루이비똥? 구찌?


비쌌다.


이게 도대체 왜 비싸냐. 첫 회사인 트라이디어에서 최고급 소가죽을 보고나서 그런지, 패턴이 찍힌 싸구려 가죽은 그냥 레쟈로만 보였다.


왜죠. 도대체 뭔지 감도 안오는 가죽에 마크만 찍어댄 가방이 왜 이리 비싼거죠?



게다가 이 여성여성스러운 동료들은 이미 위에 말한 메이커들을 1,2개씩은 갖고 있었다.


사회 초년생들도 이미 갖고 있는 가방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진희한테 넌지시 물어봤다.


평상시라면 워낙 눈치가 빨라서 다 알아버렸겠지만, 내가 말한 가방은 꽤나 비싼 가방이라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으리라.



'징규야. 너도 샤넬백 사줄까.'


'ㅇㅇ'


'ㅇㅇ. 그래. 근데 어차피 내 월급은 니가 가져가니까, 그냥 니 돈으로 산다 생각해. 그럼 하나 사줄께.'


'ㄴㄴ. 월급에는 손도 대지 말고, 밤에 대리를 뛰든 코인을 하든 알아서 돈 벌어서 사와. 그럼 받아줄게.'



됐다.


모든 것은 이미 이뤄졌다. 원익IPS는 나에게 월급에 1도 손을 안대고 샤넬백을 사줄만큼의 수익을 안겨다줬다.


라고 생각했었지. 그때는 샤넬백이 그따위로 사악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몰랐거든.



사실 진희의 친구들 (대학 친구들 or 회사 친구들이라 기본이 약사 면허증 소지자 아니면 남편이 의느님이신 분들.)은 이미 하나씩 갖고 있었다.


누구는 예물로 하나 장만했고, 누구는 애 셋을 낳아서 선물로 받았다 하고, 누구는 그냥 자기가 번돈으로 샀다고 하는 그 백이다.



우린 예물을 하지 않았다.


내세울거 하나 없는 내가 예물 운운하는것도 웃기겠지만, 여하튼 우린 예물이고 예단이고 그런거 다 생략하고 그냥 결혼식만 했다. 


샹견례만 미친듯이 거창하게 했지. 무료인줄 알고 한잔에 2만원씩 하는 와인을 들이켰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바지 음식 해오는줄 알고 한복 차려입고 오신 작은고모님이 갑자기 생각나네... 아무것도 준비 안했는데...



여하튼 이런저런 기회를 모두 놓친 진희는 샤넬백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넬백만 없는게 아니었다. 갖고 있는 가방중에 최고급 가방이 FULRA인가... 뭔가 딱 봐도 튼튼해 보이는, 가성비 쩔게 생긴 그런 가방이었다.


위에 얘기한, 샤넬백을 가진 모든 친구들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그들보다 높은 수능점수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공돌이를 만나는 바람에 해당사항 없음으로 처리되서 명품백 하나 못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애 셋을 낳지는 않았지만, 의느님 남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부자 시댁을 만난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30년 넘게 열심히 살아왔고, 특히 그중 마지막 10년은 심해 구석탱이에서 굴러다니던 나의 멱살을 붙잡고 수면 밖으로 끄집어 올려내서 임마 정신차려. 저 태양을 봐. 임마. 눈 떠! 를 외쳐준 사람이니까,


샤넬백 하나 정도는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샤넬백 하나 사주자. 그렇게 결심하게 됐다.



샤넬백은 생각보다. 그리고 생각만큼 비쌌다.


뭐 이딴 허접한 검은색 가죽가방 하나가 그따위 가격을 구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특히 미적감각이라곤 0인 내가 봤을때는 부평 지하상가에 걸려있는 가방보다도 안 이쁜 저게 왜 그리 고고한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계속해서 조언을 구하던 여성여성스러운 동료들은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샤넬은 왕이야. 루이비똥은 대학생이나 매는거지. 샤넬이야. 샤넬!!!'


'언니가 명품백이 하나도 없다고? 그럼 샤넬이지!!!'



그리고 웃긴게,


가방만 보면 전혀 안 이뻤으나, 가격을 보는 순간 뭔가 좀 이뻐보였다.


가방만 보고는 이딴 밍밍한걸 누가 사. 라고 얘기하다가도 가격을 보는 순간, 음... 마감이 괜찮은데? 로 바뀌는게 사람이었다.



날짜는 정해졌고, 가방만 사면 된다.


우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뒤졌다.


정보 없다.


생각해보면 이미 샤넬백을 선물받거나 샤넬백을 산 사람들은, 그걸 어케 샀는지 적어놓을리가 없었다.


요리조리 앞뒤좌우 외제차 엠블럼이 살짝 보이게끔 사진 찍어놓고 #선물 #사랑해 이따위 태그만 달기에 급급했다.


인터넷정보검색사 1급 필기시험 합격자인 내가 처음으로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망할!!!



여성여성스러운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이들도 주변 언니들에게 들은 얘기가 전부였다. 샤넬백을 사기에 이들은 아직 어렸다.


회사에 샤넬백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았으나, 직접 산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열심히도 알아봤다.


아... 캐비어라는게 가죽 종류구나.. 아.. 이게 금장이구나.. 아.. 이게 클래식이구나.. 아.. 이게 보이백이구나... 



그러던중 맘에 드는 백을 발견했다.


코코핸들 이라는 모델이었다.


처음에는 손잡이 부분이 도마뱀 가죽으로 되어 있던게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부산에만 있단다... 망할. 미친. 센텀시티.


하지만 그렇게 포인트 들어간걸 좋아하는건 순전히 내 취향이다.



그래서 그냥 검정색 코코핸들을 사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언제 또 사줄지도 모르는데 검은색이 제일 좋겠지.


샤넬 고객센터에 전화걸어서 물어봤다.


'내일 코코핸들 살건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네 고객님.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아.. 고객님. 죄송하지만 현재 재고가 없습니다.'


?? 응? 왜요? 내가 내돈 주고 사겠다는데 왜 물건이 없죠? 왜죠?



미친 샤넬은 가격만 배짱이 아니었다.


상술도 배짱이었다.


샤넬은 매주 화요일인가. 언제만 물건이 들어오고, 아까 얘기한것처럼 1~2개밖에 없어서 인기모델은 99% 확률로 진열상품이고,


클래식이랑 몇개의 모델을 제외하고는 예약도 안 된단다.


홈페이지에도 없다.


매일 저녁 7시인가 6시인가, 샤넬 고객센터로 전화해서 내일 물건 들어오는지 물어보는 수밖에 없단다.


뭐 이딴 거지 같은 시스템이...


라고 욕하기에는 너무나도 갖고 싶어졌다.



사람 마음 간사하더라.


처음에는 10만원 주고도 안살거라 생각한 그 가방 하나가,


지금 와서는 중고나라에 백화점 가격 + 10만원으로 올려놔도 바로 사버릴것처럼 바뀌어버렸다.



그렇게 2~3일쯤 전화했을 무렵,


상담사가 말했다.


'아 고객님. 코코핸들 내일 명동 롯데 본점에 1개 들어오네요.'


당연히 예약이고 뭐 선점이고 그딴건 없었다. 백화점 문 열자마자 경비아저씨가 사가버리면 없어지는 시스템이었다.



바로 다음날 휴가를 썼다.


그리고 백화점에 달려갔다.


그리고 물건을 봤다.


지쟈쓰. 근데 내가 원하던 카프스킨이 아니었다. 카프스킨이라 하면 샤넬백하면 처음 떠오르는 그 마름모꼴 모양의 패턴이다.


쉐브론이라고 하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뭔가 중고품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제품이었다.


그래도 한개밖에 없는 명품백인데 제일 무난한게 사고 싶었던 나는 카프스킨 카프스킨 거렸더니,


진심. 차은우보다 잘생긴 매장 직원이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고객님. 카프스킨은 블라블라 이건 쉐브론 어쩌고 저쩌고 뭐 이건 빈티지 어쩌고 요즘 카프스킨은 중년여성들이나 쓰시지 젊은 분들은 블라블라.


아... 매력에 빠져든다.


남자가 이렇게 잘생길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에 나의 뇌회로는 정지했고, 그냥 예예 그렇죠. 이렇게 생기신분이 말씀하시면 그냥 그런거죠.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바로 말했다.


'잠깐 상품권 좀 사올게요. 기다려주세요'


돌아온 답변은,


'고객님. 죄송한데 저희가 예약은 안되고 만약 다녀오시는 동안 다른 분이 오셔서 사가실수도 있습니다.'


녜이녜이. 어련하시겄습니까. 이미 샤넬의 고고함은 익숙해져있었다. 그럼요. 그렇시겄죠. 아주 대단하십니다. 예. 만수무강하세요.



포장하는데도 한참 걸렸던거 같다.


마실거를 갖다준다길래 암거나 달라 그랬더니, 넵킨에 쌓인 페리에를 갖다 줘서 감격 받은 기억이 난다.


와... 믹스커피도 아닌 페리에를 넵킨에 싸서 주시다니... 넙죽넙죽.



앉아있기 뻘쭘해서, 일어서서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엄청 친절하게 다 설명해주신다. 역시 이래서 돈이 좋은가보다.


여하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샤넬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건, 에비뉴엘에서 물건을 사면 주차비도 무료인데다가 발렛파킹도 알아서 해주시더라. 


역시 돈이 체고시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마지막편은 다음으로 넘겨야겠다.



만난지 26일째 되던 날, 인도의 신혼여행지 우다이뿌르에서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편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Posted by v멍군v